‘개새끼’를 사랑한 여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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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새끼’를 사랑한 여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 이상권 <변호사·전 국회의원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1.06.10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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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인 독립유공자 -

내포신도시 홍예공원에 여성의 독립운동과 관련된 기념물이 하나 들어서 있다. 한복 치마저고리에 댕기머리를 하고 호롱불을 어깨 위로 들어 주변을 밝히고 있는 조선 처녀상과 무릎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짧은 주름치마와 소매가 좁은 교복풍 윗옷에 단발머리를 하고 있는 국정불명의 여성상이 함께 앉아있는 모습이다.

밤중에 호롱불을 밝히고 등사기를 이용해 태극기를 찍어내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때는 만세운동 전날 밤이고 장소는 좁은 방 안인 것 같은데, 조선 처자의 왼쪽 어깨에는 참새 한 마리가 앉아있고, 엉덩이 밑을 받치고 있는 발은 중국의 전족처럼 지나치게 작고 이상하게 굽었으며, 단발머리 처자가 찍어내고 있는 태극기는 장방형이 아닌 정방형이었다. 얼핏 보기에 기이하기가 이를 데 없고 이해하기가 매우 힘든 장면이다. 

좀 더 살펴보니, 동상의 배후에 둘러친 돌 병풍 전면에는 ‘조선여자독립선언문’이 기재돼 있고, 후면에는 여성독립운동가 수백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으며, 맨 첫 번째 이름이 일본인으로 보이는 ‘가네코 후미코’였다.

이 순간 나는 일제강점기 독립만세운동에서 일본인 여학생이었던 가네코 후미코라는 분이 만세운동에 직접 참여한 것으로 지레 짐작하고, 나의 무관심이나 무식함을 속으로 질타하면서 반성의 의미로 가네코 후미코를 추적해봤다.

후미코는 1903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태어나 23년 5개월 28일간 짧게 살다 간 일본 여인으로 2018년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남녀관계가 극히 문란했던 부모 밑에서 태어나 출생신고도 못한 무적자(無籍者)였고, 아홉 살이던 1912년 고모가 살던 조선으로 건너와 충북 청원군 부용면(현 세종시 부강면)에서 부강공립심상소학교(현 부강초등학교)를 다녔다. 약 7년간을 조선에서 그렇게 살다가 열여섯 살에 3·1운동을 목격하고 바로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만세운동에 참여한 적은 없다고 한다.

후미코는 도쿄의 어묵집 점원으로 일하던 1922년 2월에 조선 유학생들이 펴낸 잡지 《조선청년》에 실린 ‘나는 개새끼로소이다’라는 시를 만났고, 그 작가 박열을 찾아내어 동거를 시작했다.

‘나는 개새끼로소이다/하늘을 보고 짖는/달을 보고 짖는/보잘것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뜨거운 것이 쏟아져/내가 목욕을 할 때/나도 그의 다리에다/뜨거운 줄기를 뿜어내는/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후미코는 이 시를 읽고 “내가 찾고 있던 사람, 내가 찾고 있던 무언가가 그 안에 있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천생연분이었던 모양이다.

박열은 그 무렵 흑도회(黑濤會), 흑우회(黑友會)라는 사회주의 내지 무정부주의 운동 조직을 운영하고 있었고, 1923년 봄 조선인 15명과 일본인 6명으로 구성된 ‘불령사(不逞社)’라는 무정부주의 조직을 만들었으며, 사회주의를 매도한 조선인 기자를 폭행하기도 했다. 조선인 기자 폭행 사건을 보면 이때만 해도 박열은 독립운동가라기보다는 사회주의 또는 무정부주의 운동가에 더 가까웠다는 생각이 든다. 후미코도 이 조직에 참여했다.

박열과 후미코는 1923년 9월 1일에 발생한 관동대지진 당시 ‘일정한 주거 또는 생업 없이 배회하는 자’에 해당돼 체포됐다가 “불령사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해 일왕에 대한 폭탄테러를 기도했다”는 소위 ‘박열 대역사건’으로 구속기소됐으며, 오랜 재판 끝에 1926년 3월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수사와 재판을 담당했던 일부 인사들이 “박열 대역사건은 관동대지진으로 성난 민심을 잠재우기 위한 조작 사건이었다”라는 것을 폭로하고 공개 사죄하기도 했으며, 조선일보 1926년 3월 26일자 기사도 일본 검찰이 조작한 사건이라고 보도했다. 결국 가네코 후미코가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투옥된 것도 아니고, 일왕을 폭살시키려고 시도한 대역죄를 지은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후미코의 언행 중 우리의 독립운동과 관련해 찾을 수 있었던 가장 근접한 자료는 후미코가 ‘3·1운동 당시 조선의 만세운동에 공감했다’는 말을 했으며, ‘박열 대역사건’ 재판 당시 “조선의 독립을 생각할 때 남의 일이라고 여길 수 없을 정도의 감격이 용솟음쳤다”고 말했다는 것 정도이다.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의 공적도 ‘박열과 함께 흑도회와 흑우회의 기관지를 간행해 무정부주의의 선전과 회원 규합에 노력했고, 박열이 주도한 무정부주의 단체 불령사에 가입해 활동 중 박열의 대역사건으로 구속돼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됐으나, 선고 4개월 후 옥중에서 순국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여기에는 ‘무정부주의의 실현을 위해’라는 전제가 있을 뿐,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라는 단어가 들어갈 작은 틈조차 없다.

순국(殉國)이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말한다. 가네코 후미코는 무정부주의의 실현을 위해 일본의 천황제에 항거하다가 복역 중 자살했을 뿐이고, 박열은 해방 후 석방돼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다. 

정부가 여성독립운동가 발굴작업에 매진하고 있는 것은 안다.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원칙없이 숫자 늘리기에만 급급한다면, 앞으로 “순국선열”이 우습게 보일 날이 도래할 지도 모르겠다.

 

이상권 <변호사·전 국회의원 칼럼·독자위원>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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