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지역 호국 영웅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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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지역 호국 영웅을 만나다
  • 황희재 기자
  • 승인 2021.06.17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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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웠던 그들의 청춘 기록, 잊지 말아야할 역사, 6·25 한국전쟁

홍주신문은 지난 9일 홍성읍에 위치한 홍성보훈회관에서 ‘6·25전쟁 참전자회 홍성군지회’소속 참전유공자 4인을 만났다. 이날 김대성(1929년생), 염규홍(1931년생), 이석군(1929년생), 김방환(1931년생) 등 4명의 참전용사들에게 1950년 6월 25일 발발해 1953년 7월 27일 휴전한 6·25 한국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었다.

<편집자 주>


청년 김대성은 중부전선 지형능선에서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어내며 많은 전우들의 목숨을 살렸다.

청년 김대성은 23세의 나이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10만 명까지 수용이 가능했던 제주 모슬포 제1훈련소에서 기초군사 훈련을 마친 김대성은 전쟁 당시 피란수도역할을 했던 부산의 동래를 거쳐 국군 8사단으로 배치돼 전방 중부전선인 지형능선과 백암산 전투로 유명한 백암산(강원도 화천군 화천읍과 철원군 원동면 사이에 위치한 산) 등지에서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켰다. 

690고지, 730고지, 710고지 등으로 구성됐던 지형능선은 과거 행정구역상 강원도 금성군 원덕면 지역이었다. 당시의 금성군 일대는 현재 대부분 북한에 속해있으며, 일부만이 강원도 철원으로 편입됐다. 

김대성은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 27일에도 백암산에서 12시간동안 적과 대치했다. 
정전협정문에 적힌 ‘본 정전협정의 일체 규정은 1953년 7월 27일 22시부터 효력을 발생한다’는 단 한 줄의 문장 때문이었다.  

김대성을 비롯해 최전방을 사수하던 군인들은 이날 오전 10시부터 12시간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오후 10시가 되자 모든 전선에서 남·북이 각각 2km씩 물러나며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4km의 공간이 형성됐다. 이날 형성된 4km의 폭은 오늘날 DMZ(비무장지대)라고 불리고 있다. 

“지형능선에서 중공군이 점점 포위망을 좁혀올 때, 상관이 포위망을 어떻게 뚫을 건지 나한테 물어보더라고. 계급에 상관없이 누군가 적절한 위치를 찾아내는 게 우선이라면서…. 결국 찾아냈고, 봇물 터지듯 군인들이 쏟아져 나왔지.”

김대성은 하사관학교를 11기로 수료했으며, 이등중사로 제대했다.
 

청년 염규홍은 포로수용소 경비병으로 복무하다 ‘6·18 반공포로석방사건’이 발생하면서 전방 8사단으로 전출돼 깊은 산골짜기에서 휴전을 맞이했다.

농촌에서 일을 하며 평범하게 살던 청년 염규홍은 6·25전쟁이 일어난 1950년 당시 열아홉이었다. 한반도를 쑥대밭으로 만든 전쟁은 다음해에도, 그 다음해에도 끝나지 않았다. 결국 청년 염규홍도 국가의 부름을 받고 6·25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제주 모슬포 제1훈련소에서 신병교육을 수료하고 광주포로수용소로 자대를 배치 받은 염규홍은 6·25전쟁 대부분을 포로수용소에서 경비병으로 지냈다. 당시 광주포로수용소에는 북한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에 반대해 반공포로라고 불리던 수많은 포로들이 수감돼있었다.
 
시간이 더 흘러 휴전 분위기가 무르익던 1953년 6월, ‘6·18 반공포로석방 사건’이 일어났다. 1953년 6월 18일~19일 이틀에 걸쳐 일어난 포로석방사건은 한국정부가 단독으로 거제, 광주, 논산 등 8개 지역의 포로수용소에서 3만 5천여 명의 포로를 석방해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역사적인 사건이다. 한국정부와 한국군의 협조 하에 포로 3만 5698명 중 2만 7388명이 수용소를 탈출했고 56명이 그 과정에서 사망했다. 

광주포로수용소에 있던 염규홍은 더 이상 경비병으로 복무할 수 없었다. 관리할 포로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염규홍을 제8보병사단으로 전출시켰다. 염규홍은 생전 가본적도 없는 최전방 산골짜기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갑작스레 전쟁터 한복판에 떨어진 그는 여느 국군들처럼 전쟁이 끝나길 바라며 주먹밥으로 끼니를 때웠다고 한다. 

“어딘지도 모르는 산골짜기에서 열이틀쯤 지냈을까. 휴전협정이 체결됐어. 산을 내려오면서 보니까 여기저기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더라고.” 휴전협정체결당시 그의 나이는 22살이었다.
염규홍은 육군 55연대와 8사단을 거쳐 하사로 제대했다.

청년 이석군은 6·25전쟁 당시 속초, 연천, 포천 등 동부전선과 중부전선에서 통신병으로 활약했다. 

이석군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제2훈련소(現육군훈련소)’라는 이름으로 창설된 훈련소에서 군 생활을 시작했다. 

해당 부대는 창설 당시 대통령이 친필휘호로 연무대라고 명명해 연무대라는 명칭으로도 잘 알려져 있고, 논산에 위치해있어 오늘날 흔히 논산훈련소라고도 불린다. 이석군은 70여 년 전의 본인 소속 소대(1소대)와 분대(1분대)를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12주의 기초군사훈련을 마친 이석군은 육군 제1사단으로 자대를 배치 받는다. 별칭인 전진부대로도 유명한 1사단은 청년 이석군이 신병이었던 당시에도 다부동전투(1950년 8월 3일~8월 29일)와 평양전투(1950년 10월 17일)를 승리로 이끈 명문부대였다. 이석군은 중대장 통신병으로 보직을 부여받고 연천, 포천, 속초 등 중동부전선에서 활약을 펼쳤다.
 
전진부대 1사단의 중대장 통신병이었던 만큼, 그가 참전했던 전투지역은 노리고지, 베티(Betty)고지 등 처절한 전투가 수없이 벌어진 장소들이었다. 노리고지 전투와 베티고지 전투로 경기도 연천에 흐르는 임진강이 붉은 피로 물들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다. 

“낮에 빼앗겼다 밤에 다시 탈환하는 고지전이 수없이 반복됐지.” 이석군의 왼쪽 종아리에는 아직도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다. 전쟁에서 통신병은 전투의 승패를 좌우하는 막대한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이석군은 아직도 통신 암호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전쟁터에서 수도 없이 무전을 주고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1953년 7월 15일~16일 이틀간 벌어진 베티고지 전투는 정전 이후 ‘격퇴’(1956년), ‘베티 고지의 영웅들’(1980년) 등 영화로 만들어져 상영되기도 했다.

이석군은 영광의 상처를 왼 다리에 간직한 채 일등중사로 제대했다. 
 

청년 김방환은 제3사단 23연대 연대장 호위병으로 949고지에서 활약했으며 헌병대 출신이다.   

청년 김방환은 1951년 20세의 나이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그 역시 많은 국군들처럼 제주도 모슬포 훈련소에서 신병교육을 받았다. 신병교육을 수료한 후에는 대구에 있던 헌병학교에 입소해 헌병이 됐다. 

그는 “전방에 8개월간 머물렀다”고 증언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강원도 어느 산골짜기에 있었지. 949고지에도 한참 있었고. 전부 산이어서 정확한 행정구역은 모르겠네.” 그가 말한 949고지는 당시 강원도 김화군 임남면 지역으로 전쟁 직후 북한으로 넘어간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철원군에 편입된 상태다. 

현재 강원도 철원군 임남면은 민통선(민간인출입통제구역)내에 위치해 단 한 명의 주민도 거주하지 않는 곳이다. 법정리로는 원전리, 과호리, 좌패리, 수동리를 포함하고 있다.

그는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홍성군지회’를 이끌고 있는 지회장이기도 하다. “요즘 6·25전쟁을 모르는 학생들도 있다고 들었어.” 

“중령이나 대령으로 예편한 장교출신 유공자들이 학교를 돌아다니며 ‘6·25 바로 알리기’교육을 하고 있지. 매년 6·25전쟁 참전용사의 공헌을 알리고자 사진전도 개최하고 있고.”

김방환은 입대한지 5년이 지난 1956년 9월 30일 하사로 제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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