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과 ‘불화’가 만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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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과 ‘불화’가 만날 때
  • 윤정용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1.08.06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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퓰리처상을 수상한 존 패트릭 섄리의 희곡 《의심》(2005)은 활력이 넘치고 자유로운 사고를 하는 젊은 신부와 가톨릭 교회의 엄격한 규율과 원칙을 지키려는 원장 수녀와의 대립을 극화하고 있다. 젊은 신부를 의심하는 원장 수녀는 ‘교리를 따르고 규율에 입각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선하고 옳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하고, 자신의 신념에서 벗어난 것은 모두 의심의 눈길로 바라본다. 그녀는 객관적 상황, 당사자의 말과 행동에 대해 조금도 재고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원래 의심은 눈에 보이는 현상의 단면을 믿어버림으로써 발생한다. 의심이 발생하면 현상의 다른 측면은 간과된다. 의심은 또 다른 의심을 통해 정당화된다. 의심이 의심일 뿐이라는 게 밝혀져도 의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의심》을 원작으로 <다우트>(2009)라는 제목의 영화도 만들어졌다. 원작자인 섄리가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까지 했기 때문에 원작인 희곡과 이를 바탕으로 한 영화는 내용이 거의 똑같다. 영화는 ‘의심이 가진 위력과 의심의 근원’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의구심과 불확실성, 편견과 도덕적 딜레마, 종교적 신념과 권력관계 등의 주제를 형상화한다. 이 작품은 의심이 인간관계를 한순간에 망가뜨릴 수 있다는 점을 잘 예거한다. 지속적으로 발생되는 사회적 변화와 도덕적 딜레마에 의해 표출되는 갈등과 그에 대한 해결책의 모색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아서 밀러의 《시련》(1954)은 미국 매사추세츠주 세일럼 마을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마녀재판을 극화한 작품이다. 세일럼은 청교도 교리에 의해 운용되는 신정정치 공동체 사회다. 그 마을에서는 ‘극장 또는 ‘헛된 향락’이라 할 만한 그 어떤 것도 용납되지 않는다. 하지만 한 소녀 주도로 마을 소녀들은 밤중에 몰래 빠져나가 숲 속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춤을 추며 논다. 하지만 목사가 그 광경을 목격하고 그의 딸은 충격과 두려움으로 혼수상태에 빠진다. 그 후 마을에는 마녀가 존재한다는 소문이 떠돌고, 놀이에 참여했던 몇몇 소녀들은 어른들에게 혼날까봐 두려워 ‘마녀의 사주’로 그런 일을 벌였다고 거짓말을 한다. 엄격한 청교도 사회에 염증을 느낀 소녀들이 벌인 사소한 장난과 거짓말, 그리고 ‘불화’에서 비롯된 이웃에 대한 시기와 질투는 ‘마녀사냥’과 ‘마녀재판’이라는 끔찍한 결과를 불러온다.

《의심》이 <다우트>로 영화화된 것처럼, 《시련》 또한 <크루서블>(1996)로 영화화됐다. 밀러는 《시련》에서 세일럼의 재판관들의 권위에 반대하는 자들을 재판의 위엄을 파괴하는 무리, 즉 마녀로 낙인찍어 교수형에 처하도록 한 1690년대의 사회적 분위기를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에 반대하는 모든 인사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인 1950년대의 폭압적인 정치 상황과 ‘유비(analogy)’하고 있다. 《시련》은 세일럼 마을 사람들의 개인적 차원의 죄, 즉 개인적인 ‘원한’, ‘증오’, ‘복수’가 사회적 행위와 어떻게 연관되는가를 주제로 형상화하고 있다. 즉 ‘이웃 간의 불화’ 혹은 ‘공동체의 붕괴’가 어떤 비극적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극명하게 예증한다.

《의심》과 《시련》의 주제와 이야기를 끌어가는 핵심 동력은 각각 ‘의심’과 ‘불화’다. 개인의 의심과 이웃 간의 불화는 때로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온다. 하지만 처음부터 서로 의심하거나 불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의심》에서 젊은 수녀는 신부가 학생과 동성애 관계에 있다고 의심하고 확신했다기보다는 단지 흑인 학생이 불편했을 뿐이었고, 그 ‘불편함’을 원장 수녀에게 토로했던 것이다. 《시련》에서 숲 속의 장난을 주도한 소녀와 그곳에 있던 소녀들을 발견한 목사도 처음에는 그들의 ‘질투’와 ‘시기’와 같은 개인적인 감정을  보았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 프록터에 대한 자신의 ‘원한’을 얹었다. 《의심》의 원장 수녀나 《시련》의 목사는 의심과 불화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의심》과 《시련》은 현재의 대한민국을 여러모로 상기시킨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사건과 사태가 넘쳐났고, ‘공정’과 ‘정의’라는 이름으로 열띤 토론과 논쟁이 벌어졌다. 그런데 공정과 정의라는 이름으로 개진되는 주장 가운데 상당수는 개인적인 ‘의심’과 ‘불화’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상식적인 차원에서 말하면 토론과 논쟁의 본령이자 핵심은 상대방의 말을 잘 듣는 것이다. 상대방의 생각에 자신의 생각을 견주고 뾰족하게 다듬는 게 토론이자 논쟁이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진 토론과 논쟁을 보면 ‘상대방의 말 듣기’는 사라지고 오직 ‘자기 말하기’만 남아 있을 뿐이다. 게다가 말하는 내용은 객관적인 사실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 ‘일단 상대방의 말은 무조건 의심하라’는 경구는 어느덧 토론과 논쟁의 최선의 무기가 돼버렸다. 상대방에게 의심의 화살을 마구 들이대는 게 토론과 논쟁의 정석이자 상식이 돼버렸다. 앞서 《의심》과 《시련》에서 보았듯이 상대방에 대한 의심과 불화는 예상치 못한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 끔찍한 결과는 상대방에게만 향하지 않는다. 이제는 상투적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너 자신을 알라”, “알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게 진정한 앎이다”와 같은 옛 성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다. 우리는 세상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도 괜찮다. 아니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해야 한다. 상대방을 의심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을 의심해야 한다. 상대방을 의심할 때는 그 의심이 합리적인 의심인지 아니면 개인적인 원한과 불화에서 비롯됐는지를 의심해야 한다.

윤정용 <문학평론가·칼럼·독자위원>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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