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익을 다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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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익을 다시보자
  • 조남민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3.09.21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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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장사익의 공연이 열렸다. 늦여름 밤의 무더위가 무색할 정도로 홍주읍성을 가득 메운 관람객들은 고향을 찾은 장사익의 음악과 열정에 큰 박수를 보냈다. 그 또한 웅장한 무대와 화려한 조명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공연을 선보이며 ‘영혼을 울리는 장사익’의 진면목을 보여 줬다. 홍성보다 오히려 홍성 밖에서 더 유명한 ‘장사익’, 그는 누구인가. 

장사익은 1949년 홍성군 광천읍 삼봉마을에서 7남매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오서산 아차산을 지나 삼봉산으로 내려오는 장쾌한 정기를 타고난 탓에 목청이 남달랐고, 집 앞에 흐르는 ‘보통’천의 유연한 물길을 닮아 천성이 유순했다. 

‘우리 집은 동네의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데 집 앞에는 논이 있고, 그 앞에는 긴 둑이 가로놓여 있다. 태어나 성장하며 하루도 빠짐없이 걸어 다니던 벚나무 울창한 긴 둑은 나의 또 다른 탯줄 같은 길이기도 하다. 봄에는 희망의 새싹들이 돋고 벚꽃이 피면 온 동네는 화사한 꽃 천국이 된다. 그 당시 광천 유일의 꽃길이었던 우리 동네는 밤에 벚나무 불을 켜 놓고 밤 벚꽃놀이도 하며 상춘객들의 유일한 꽃 축제의 길이며 데이트 길이기도 했다. 가끔은 1m 거리를 두고 걷는 남녀들을 보고는 “얼라. 저 사람들 좀 봐요, 남부끄럽지도 않은가벼!”하며 온 동네 사람들은 즐겁게 농하며 부러워하기도 하였다.’(장사익의 글 ‘포근한 부모님의 품속’, 2005년 발행 ‘홍성문화 128호’ 중에서)

중학교까지 광천에서 마친 그는 서울로 상경해 고등학교를 다녔다. 이후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음악학원을 다녔고, 대중음악을 비롯한 다양한 장르의 음악에 관심을 가졌다. 1980년대에 대금의 명인 원장현을 만나 대금과 태평소를 배웠고, 강영근으로부터는 피리를 배웠다. 국악에 심취한 그는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국악에만 전념, 1993년과 1994년 전주대사습놀이에서 태평소 연주로 두 해 연속 장원을 차지했고, 1995년에는 KBS 국악대상 ‘뜬쇠사물놀이’로 대통령상을 받았다. 

공주농악, 금산농악, 결성농요에 참여하며 몸에 배어있던 끼를 마음껏 발휘하기 시작하고 드디어 1995년, 주변 사람들의 성화에 떠밀려 첫 앨범을 발표한다. 45살의 늦은 나이에 데뷔한 그는 가요와 비가요를 넘나드는 독특한 창법과 가슴속을 파고드는 깊은 울림으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줬으며, 평창 동계올림픽 무대를 비롯한 국내·외 유수의 무대에서 수많은 공연을 펼쳐왔다. 

장사익의 음악에 매료된 사람들은 그의 공연이 열리는 곳은 어디든 찾아가서 지친 삶을 돌아보는 휴식의 시간을 가지며 영혼을 위로받는다. 장사익의 노래를 한 번이라도 끝까지 들어본 사람은 묘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이게 뭐지?’라며 다른 곡을 들어보고, 또 다른 곡을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야말로 ‘젖어들게’된다. 이것이 장사익의 노래가 가지는 힘이다. <찔레꽃>, <국밥집에서>, <허허바다>, <아버지>, <꽃구경>에서는 슬프면서 슬프지 않은 ‘애이불비(哀而不悲)’의 감정이 여지없이 묻어나게 된다. 

‘소리꾼 장사익’은 사실 ‘소리꾼’이 아니다. ‘판소리나 잡가를 잘하는 사람, 또는 소리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을 소리꾼이라고 하는데 장사익의 노래는 이것과 거리가 있다. 그렇다고 장르가 대중가요인 것도 아니다. 그가 부르는 것은 가창(歌唱)이고 가창(嘉唱)이며, 그는 ‘영혼을 울리는 가객(歌客)’이라고 불러야 한다.

국악도 아니요, 양악도 아니며, 판소리도 아닌 것이 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진하게 잡아끄는 것은, 그의 노래 속에 한결같이 배어있는 어떤 정서가 있기 때문인데, 그것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바로 ‘정(情)’이다. 장사익의 노래에는 정이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에 듣고 또 듣게 되는 것이다. 그 ‘정’의 원천은 바로 ‘고향’이고 ‘사람’이고 또한 ‘그리움’이다. 

‘내 고향 광천! 이제는 옛날 추억만 가득한 고향이 아니다. 정든 사람, 옛 친구들도 떠났지만 그래도 고향은 부모님과 같이 거기에 있다…. 고향, 그곳은 진정 내 마음의 보금자리요, 맘만 먹으면 하루에도 수십 번 찾아드는 정겹고 포근한 부모님의 품속과 같다.’(장사익의 글 중에서) 

가만 생각해보면 장사익은 꼭 ‘광천처럼’ 생겼다. 무대 앞에 반듯한 자세로 꼿꼿하게 서 있을 때는 웅장한 오서산을 닮았고, 얼굴에는 ‘보통 냇갈 옆댕이’ 꼬불꼬불한 논둑길처럼 편안한 주름이 있으며, 목청은 장항선 열차 화통소리를 삶아 먹은 듯하다. 노래 끝나고 내려와서 삽 하나 들고 상지다리 밑 논둑길로 가면 영락없는 농부로 볼 참이다. 

장사익은 늘 고향을 잊지 않고 산다. 의리 있는 광천사람들은 그의 동네 앞에 찔레꽃 길을 조성했고, 주변 폐교를 활용한 다양한 문화공간도 구체화 되고 있다.

국회의원 한 사람이 각각 헌법기관이듯이 장사익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문화콘텐츠’다. 충절의 고장 홍성이 춤, 그림, 음악 등이 살아 숨 쉬는 ‘예향의 고장’으로도 주목받을 수 있도록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조남민 <홍성문화원 사무국장·칼럼·독자위원>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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