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당산송(石堂山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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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당산송(石堂山頌)
  • 구재기 시인
  • 승인 2013.07.08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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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재기 시인과 함께하는 시로 찾는 ‘너른 고을 홍성’ <4>

 

▲ 구재기 시인.

 

 

 

 

 

머언 먼 하늘이
사뿐 맨발로 내려와 앉음은
불사(不死)의 바다, 영생(永生) 입술로
석당(石堂) 솔숲의 짙은 향기
천년을 하루 같이, 하루를 천년처럼
풋풋하게 풍겨왔음이라,
그렇게 살아오고 살아감이었어라
성터, 뒹구는 돌에
푸르고 푸른 이끼가 돋아
발 디디는 곳마다 먼저 젖어들면
보살 같은 손길 소담히 모아
영원을 노래하는 솔바람 소리
아, 땅 속 깊이 촉촉이 스며드는
하늘의 뜻이여
그 호연(浩然)한 기품이여 

 

 

 

 



옛 고을로서의 자취가 많이 남아 있는 결성면(結城面)은 백제 시대에는 이미 하나의 어엿한 읍성으로 옛 홍주(洪州)와 1914년 합군(合郡)되기까지 대등한 군세를 자랑했다. 읍내리에 충남문화재자료 306호(1989.04.20)인 결성동헌(結城東軒)과 형방청(刑房廳), 책실(冊室) 등과 곳곳에 흩어져 있는 성돌은 옛 역사를 말해준다. 이 결성동헌을 울창한 술숲으로 감싸안고 있는 산이 바로 석당산(石堂山·146m)이다. 결성읍성은 이 석당산록을 기어오르면서 축성되었다. 어엿하게 해자(垓字)의 흔적도 남아 있으며, 석당산 정상부에는 700m 둘레의 통일신라시대 토축산성의 흔적이 토축산성과 포개짐을 보여준다. 조선 문종 때 축조된 결성읍성 또한 산의 북쪽 기슭을 에워싸고 있는데, 산 아래의 동헌도 초기엔 산성 정상에 위치했었을 정도로 석당산은 서해관문의 요지였다. 오랜 역사와 함께 자라난 소나무 밑동에는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이 대체 연료 사용 목적으로 송진을 채취한 흔적이 남아있었는데 지금에는 그런 소나무조차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홍보지구 방조제의 축조로 성남리를 휘돌아 수룡포구를 지나 천수만으로 흐르던 모산만의 출렁이던 푸른 물결도 사라지고, 안면도쪽으로 지던 환상적인 낙조조차 볼 수 없어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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