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오고개에 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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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오고개에 앉아
  • 구재기 시인
  • 승인 2013.08.26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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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재기 시인과 함께하는 시로 찾는 ‘너른 고을 홍성’ <10>

 

 

 

고개는
바로 가기 위해 마련된 것
분노할 시간을 길게 할 수 없다
고개 위에 가로놓인 채로
그 동안 참았던 침묵도
태초의 창칼처럼 함성이 된다
길은 항상
가장 가까운 데 있는 것
어디서 왔는가는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와서
어디로 갈 것인가, 그 동안
먼 곳을 돌고 돌아 예까지 왔다
창끝도 칼날도 갈고 갈아
가슴 깊이 품은 채로
참으로 오래오래
발자국 소리를 감추며 살아왔다
비로소 이곳에 와서
품속의 창과 칼을 꺼내들었는데
발자국을 멈추고
어찌 살아갈 수 있으리오
이곳에서는 전 생애를 다할 수 있다
짧게 살고도
오래 살아온 사람들, 바로
여기에 옹이 되어 모여 있다 


'하우고개' 또는 '황우고개'라고도 부르기도 하는 이 고개는 홍주읍 옥암리에서 구항면 황곡리(篁谷里) 먹굴로 넘어가는 곳으로 옛 국도 29호선 바로 곁에 있다. 옛 홍주를 지나 해미(海美), 서산(瑞山)으로 가는 행인들이 쉬면서 말이나 소에게 풀을 먹이고 사람들은 지친 발걸음에 한숨을 돌렸다는 데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고개는 해발 394.3m의 백월산(白月山)에서 뻗어 내린 한 활개가 보개산(寶蓋山)을 거쳐 해발 320.7m의 지기산(智基山)에 이르는 산줄기를 이어주는 것으로 보아 옛날에는 확실히 높고 험했음을 말해주고 있으나 나즈막하게 무너지고 깎이고 지금에는 국도 21호선의 자격마저 상실해버린 채, 시원스레 아스팔트 포장 4차선으로 새로 뚫린 국도 29호선을 굽어보고 있다.

바로 이 '하우고개'의 오른쪽 길가에 '홍주병오의병주둔유지비(洪州丙午義兵駐屯遺地碑)'가 세워져 있다. 비신(碑身) 좌우와 뒷면에는 개략적으로 '홍주병오의병(洪州丙午義兵)'에 대한 글과 함께 4319년 11월에 세워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단(基壇)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져 있다. 여기 나라를 위해/ 왜구를 쳐부수려 홍주성으로/ 한 몸 바치려는 배달의 의용들/ 죽엄의 북소리에 발 맞추어/ 부모 처자 뒤에 두고 한 곳에 모였네/ 그 이름 거룩할 손 9백의 의사. 1906년 당시 사기충천한 의병들이 깃발을 높이 치켜들고 드높은 함성을 가득 채웠던 '하우고개' ― 그러나 지금은 그 함성은 간 곳 없고,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한여름의 키 큰 나무들이 무리 지어 짙은 초록을 토해 놓는다. 이 초록이 자라고 또 자라나면 역사는 말없는 증언으로 침묵을 다스리며 쌓여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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