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부끄러움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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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부끄러움이 없다
  • 김상구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14.05.15 14:4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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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의 충격은 우리사회 곳곳으로 스며들어 국가 자체에 대한 총체적 문제제기로 확대되고 있는 양상이다. 국민들의 생명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하는 국가가 무슨 나라인가에 대한 회의와 함께 세월호와 관련된 사람들의 허접한 모습에서 우리 자신뿐만아니라 사회의 구석구석을 되돌아보게 한다. 팬티 바람으로 승객을 버리고 구조선에 올라타는 선장의 모습, 세월호 승객의 구조에 허둥대며 인근의 어부만도 못한 해경, 뒷수습하나 매끄럽게 하지 못하고 변명과 거짓말로 우리 공동체 사회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공직자들, 청해진 해운의 실 소유자로 알려진 유병언 전 세모그룹 일가의 검찰에 대한 불응 등은 염치와는 멀찌감치 거리를 둔 뻔뻔함의 모습들이다. 이러한 염치를 모르는 자들의 모습은 어느 시대·사회나 있게 마련이지만 우리사회의 심각성은 이러한 자들의 숫자가 점점 많아지고 이들이 사회의 지도층으로 속속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사람들의 모습에 가슴아파하며 이들이 염치를 갖고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일찍이 아일랜드 출신의 제임스 조이스는 ‘더블린사람들’에서 더블린 사람들의 정신적 마비(paralysis)를 주제로 소설을 썼다. 조이스가 바라본 더블린 사람들은 종교적, 정치적, 가정적으로 염치를 모르는 자들이었다. 카톨릭 신부들은 신자들의 영혼을 위한 미사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돈을 주제로 한 설교로 신자들의 도덕성을 오히려 마비시킨다. 선거를 앞둔 어느 후보의 사무실에서 운동원들은 자기 후보의 팜플릿을 돌리지 않고 그 종이를 난로 불쏘시개로 사용하면서 후보가 오늘 저녁에는 맥주를 사올 것 인지 아닌지, 두둑한 돈을 줄 것인지, 당선되면 나는 무슨 자리를 얻게 될 것인지에 관심을 기울인다. 물론 후보도 선거구민을 위한다고 떠들지만 말뿐이고 개인의 사익과 끼리끼리의 당파 이익을 위해 귓속말로 소근거릴 뿐이다. 이와 비슷한 사람들의 모습이 15편의 단편 속에 다양하고, 섬세하게 묘사되고 있다. 조이스가 이 작품을 쓰게 된 동기는 더블린 사람들의 관습, 행동, 생각을 정확하게 기록하여 얼마나 그들이 정신적 돼지우리 속에 살아가고 있는지를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의도에서였다. 1920년대의 더블린 사회나 세월호를 통해 드러난 우리 사회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소설 속의 인물들처럼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은 거울속의 추한 모습을 보아도 자각하지 못하는 특성이 있다. 그것은 부끄러움을 느끼는 센서가 고장 났거나 내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은 전형적인 자기 평가적 감정이다.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자신의 내면세계에 설정되어 있는 도덕적 가치기준에 자신의 행동이 이르지 못했을 때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가 설정해 놓은 행동기준에 자신의 행동이 미치지 못했을 때이다. 후안무치한 사람들은 개인과 공동체가 설정한 가치기준 자체가 부재한 자들이다. 그러니 이들은 부끄러움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을 바닷물에 빠뜨려 죽게 한 선장은 팬티바람으로 배에서 빠져나와 태연히 지갑 속의 돈을 말리고 있었다고 한다. 우리시대가 만들어 놓은 패덕(悖德), 아니 우리의 또 다른 일그러진 자아(自我)일는지 모른다. 우리사회의 지속적 발전을 위해 정부부터 근본적이고 혁신적인 국가 시스템으로 개조를 단행해야 하겠지만 모든 제도를 만들고 시행하고 감독하는 일도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공직자(우리) 내면세계의 진실성이 요청된다. 출세를 향해 거짓말을 일삼는 공직자·공인의 수가 줄어들지 않는다면 제도를 바꾸어 본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개인의 후안무치는 개인의 불행이나 개인 간의 불화로 끝날 수도 있지만 공직자의 몰염치는 우리가 쌓아올린 사회의 신뢰를 아래부터 허물어뜨린다. 세월호를 통해 드러난 선장과 유병언 일가와 공직자·공인들의 허접한 행태는 국민들을 실망시키기에 모자람이 없다. 맹자가 이야기하는 군자 삼락(三樂) 중 하나가 부끄러움이 없는 상태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은 양심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는 의미일 것이며, 아래를 굽어보아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은 윗사람이나 공직자가 되어 공동체가 설정해 놓은 가치기준에 행실이 당당하고 떳떳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맹자는 염치를 모르는 자들에게 다음처럼 일침을 가한다. “사람은 부끄러움이 없어서는 안 된다. 부끄러움이 없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면 부끄러워질 일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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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민정 2014-06-03 12:41:01
다시 한번 들어와서 부끄러울 줄 알아야 부끄러움이 없다 글 읽어봅니다.
벌써 49일이 지나가고...우린 그 49일동안 무엇을 했는지 뒤 돌아봅니다.
참 빨리 지나고 못 견딜것 같은 그 수치심도 이제는 아련해 지고
나 아니면 안된다는 선거용 막 말들이 피곤합니다.
공감가는 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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