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의 맷돌과 위험사회
상태바
사탄의 맷돌과 위험사회
  • 김상구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14.06.12 17:13
  • 댓글 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국의 19세기 낭만주의 시인 중의 한 사람인 윌리암 블레이크(1757-1827)는 환경적으로 파괴되어 가는 런던의 피폐함과 우울해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영국 산업화의 부작용을 예리하게 감지했다. 한밤 중 런던 거리에서 들려오는 창녀의 저주 소리는 갓 태어난 아기의 울음소리를 그치게 하고 몇몇 힘 있고 돈 있는 자들이 런던 거리와 템즈강을 특허 내어 독점해버렸으며 스모그로 고통 받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비애의 자국(marks of woe)이 짙게 배어 있다고 ‘런던’이라는 시에서 산업화가 몰고 온 런던의 황량함을 묘사하고 있다. 또한 ‘밀턴’에서는 19세기 초 영국이 산업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사탄의 맷돌(satanic mills)’이 돌아가고 있다면서 자본주의의 탐욕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냈다.

블레이크가 이야기하는 ‘사탄의 맷돌’은 산업혁명을 통해 시장 중심의 자본주의를 추진해가는 영국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다. 이 표현을 오스트리아의 사회경제학자 칼 폴라니(1886-1964)는 자신의 저서 ‘거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 2부의 소제목으로 빌려다 쓰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의 종말이 눈앞에 보이는 상황에서 유럽은 전쟁 후 다시 1930년대 이전의 시장중심주의로 돌아가서는 1930년대와 같은 경제공황에 또 휘말리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이 책은 담고 있다. 시장이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에 의해 조정될 수 있다는 ‘자기조정시장(self-regulating market)’은 ‘황당무계한 유토피아(stark utopia)’라는 것이다. 이러한 질서(인간, 자연, 화폐도 상품화하여 시장에서 무한 경쟁하는 질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만에 하나 실현된다면 인간과 자연은 철저히 파괴되어져 갈 것이고 사회는 스스로 보호하기 위하여 조치(노동조합 등)를 취하지 않을 수 없으니 사회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유럽사회는 애초부터 가능하지도 않은 자기조정시장의 질서를 다시 채택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폴라니는 자본주의의 비도덕성을 다시 문제 삼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완벽한 시장질서 자체가 애초부터 가능하지도 않은 유토피아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칼 막스와도 다른 ‘사회’라는 개념에 주목했다. 요즘 신자유주의를 통한 소득의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면서 폴라니의 생각들이 다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세월호가 물속에 침몰하여 뒤집히는 과정을 생생히 바라보면서 금할 수 없는 또 하나의 분노는 자본주의의 탐욕이 이곳에도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배가 침몰하는 과정에서 나 먼저 살고 보자는 선원들의 비윤리적 직업의식과 젖은 돈을 말리는 선장의 천박함은 뒤로 하고, 선적화물의 톤수를 속여 보험금을 타내보려는 선박회사의 탐욕은 참담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세월호 선원들은 배가 뒤집히는 긴박한 순간에도 끝없이 선박회사와 전화를 하며 승객구조 보다 숫자 조작에 가담하고 있었다. 이러한 행동의 근원에는 인간보다 돈이 먼저라는 자본주의의 탐욕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극대 이윤을 추구하려는 자본주의의 탐욕은 인간과 자연을 이용과 개발의 대상으로 삼았고 그 결과 기후변화와 같은 자연재해는 도리어 인간을 위험에 빠뜨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만들어 내는 모든 생산물들은 개인의 사유화가 이루어지지만 그 결과 나타나는 위험들은 불특정 다수에게 돌아간다. 원자력 발전소 폭발, 가스 누출, 백화점과 교량의 붕괴 등은 이것과 직접 연관이 없는 사람들이 더 피해를 보게 마련이다. 그래서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1945~)은 ‘위험사회-새로운 근대성을 향하여’라는 책에서 과학기술 문명의 발달로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커다란 위험이 발생할 수 있음을 경고하였다. 그는 위험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중들이 위험 요소들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지속적으로 넓혀 줌으로써 사회적 제어력을 높여주는 ‘성찰적 근대화’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세월호를 비롯한 많은 사고를 되돌아 볼 때 우리사회는 성찰적 근대화와는 거리가 먼 위험사회에 머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극대 이윤만 추구하는 자본주의 시장은 모든 것을 빨아들여 갈아버리는 ‘사탄의 맷돌’과 같다. 사탄의 맷돌이 끌어당기는 자장(磁場)이 너무 강력하여 인간과 자연이 살아 남을 수 없을 때는 사탄의 맷돌을 치워야 하겠지만 지금 당장은 돈보다 사람이 먼저라고, 이웃을 사랑하고 도덕성을 회복해야 한다라고, 프랑스의 석학 기 소르망(1944~)이 이야기하는 기부문화를 실천해 보자라고 공허해 보이지만 외칠 수밖에 없어 보인다. 도심의 한산한 뒷골목에 ‘돈에 미친 사회를 확 바꿉시다’라는 어느 당의 빛바랜 선거용 플래카드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2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지정순 2014-06-18 14:50:27
결국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절실히 느끼게 합니다. 문제 속에 있는 개인들을 우리가 제3의 눈으로 객관화시켜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 볼 수는 있지만, 결국 그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원초적인 생각으로 돌아 갑니다. 급속한 산업화가 결국 인간을 하나의 기계부품으로 전락하게 만드는데 일조를 했고, 자본주의의 부작용은 물질

홍민정 2014-06-18 10:27:44
그동안은 끝없는 성장을 외쳤다면 이제는 성찰이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참 아닌 부분이 많지만
성찰적 근대화를 담아 봅니다.
고맙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