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 시리즈 5(청바지, 영원한 청춘으로 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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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 시리즈 5(청바지, 영원한 청춘으로 남고 싶다)
  • 윤여문(청운대 교수·칼럼위원)
  • 승인 2015.08.06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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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수업에서 ‘음악가가 되어 좋은 점이 무엇이냐’는 학생들의 질문에 ‘나이를 먹어도 양복대신 청바지를 입을 수 있다’는 웃기지도 않는 대답을 했다. 나는 흰색 티셔츠나 가죽 재킷만 걸쳤을 뿐인데도 거친 남자의 매력과 향기가 발산되는 청바지를 사랑한다. 멋진 몸매를 만들어 죽을 때까지 청바지를 입고 싶다. 하지만 나의 이런 소박한 희망은 고등학교 시절 아무리 노력해도 170cm에서 꿈쩍 않고 정지해버린 신장 덕분에 일찌감치 박살났고, 더군다나 나이를 먹어가면서 가뜩이나 작은 키가 조금씩 더 줄어들고 있다. 그러므로 흰색 면 티와 청바지를 입고 멋진 컨버터블 자동차에 대충 기대어 담배 한 대를 시시껄렁하게 피우는 제임스 딘의 반항적인 모습을 따라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던 것이다.

신체적으로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청바지에 집착한다. 미국 서부시대에 노동자와 광부들의 작업복에서 시작한 이 태생이 불우하고 저렴한 의복은 여러 세대를 거쳐 다양한 모양으로 진화되어왔다. 가장 기본적인 디자인인 스트레이트 핏, 헐렁한 폭의 배기핏, 허벅지에서 서서히 좁아지다가 무릎부터 다시 폭이 넓어지는 부츠컷, 시작부터 끝까지 몸에 타이트하게 붙는 스키니 핏 등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청바지가 있다. 계절을 가리지 않고 입을 수 있는 청바지를 대중들은 각자의 옷장 속에 몇 벌씩은 가지고 있을 정도로 꾸준히 사랑한다. 나 역시도 삐쭉삐쭉 헝클어진 머리와 독특한 디자인의 티셔츠에 안성맞춤인 찢어지고 빛이 바랜 낡은 청바지를 애용한다.

청바지의 매력은 포용성과 저항성, 그리고 보편성에 있다. 청바지에 목선이 늘어난 티셔츠를 입어도, 체크무늬 남방을 입어도, 심지어 양복 상의 같은 격식 있는 옷을 받쳐 입어도 최소한 어정쩡한 패션스타일이라는 비난에서 자유롭다. 또한 운동화, 정장 구두, 심지어 슬리퍼를 신어도 자유로운 패션의 완성이 가능하다. 이러한 청바지의 보편적인 기능은 1970년대 미국의 반전문화와 히피문화에서 비롯된다. 비슷한 시기에 그들의 문화가 우리나라로 건너오면서 통기타와 더불어 유신독재에 반발하는 의식 있는 젊은이들의 상징이 되어, 시대정신이 결여된 기성세대를 질타하는 채찍의 의미가 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청바지는 그 자체로 경직된 기존 사회에 대한 젊은이들의 적극적인 반항이자 합리적인 시대를 요구하는 사회적 아이콘이라 할 수 있겠다. 이처럼 청바지는 가죽 재킷과 더불어 오랫동안 반항과 자유의 상징이 되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젊은이들만의 전유물이라 할 수는 없다. 여성들은 골반을 드러낸 청바지로 섹시미를 한껏 발산하고, 한 기업의 수장은 검은색 터틀넥과 청바지를 입고 자사의 공식적인 신제품 출시 행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또, 대통령이나 정치인들은 청바지를 입고 언론에 노출됨으로써 권위적이고 경직된 이미지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인심 좋은 옆집 아저씨 같은 이미지를 연출한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내가 개인적으로 청바지를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록 음악 때문이다. 록 음악은 젊은 시절에 듣지 않으면 영원히 그 맛을 알 수 없는 독특한 음악이다. 록 음악은 ‘젊음’이라는 공통분모로 청바지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거칠게 파열하는 기타, 당장이라도 무언가 부숴버릴 것만 같은 드럼, 그리고 짐승의 울부짖음과 흡사한 보컬에 맞추어 긴 머리를 흔들어 대는 젊은이들에게 청바지는 아주 자연스러운 의복인 것이다. 젊은이들은 청바지를 입고 록 음악을 들으면서 기존의 일률적인 관습에 편입하느니 차라리 외로운 아웃사이더로 남기를 희망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도 젊은 시절에는 몸속에 태양의 온도보다 더 뜨거운 피를 갖고 있었던 적이 있었다.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록 음악을 들으며 터질 것 같은 열정 하나만으로 기약 없는 미래를 설계했던 시절이었다. 내가 불혹을 훌쩍 넘긴 지금도 청바지에 집착하는 이유는 아마도 떠나간 내 젊음에 대한 아쉬움이나, 혹은 다시 붙잡을 수 없는 지나간 젊음에 대한 미련 때문이 아닌가 싶다. 목련의 짧은 만개처럼 내 젊은 날은 어느새 사라졌지만, 나는 여전히 그 시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아직도 청바지만 입고 있으면 예전에 내가 그렇게도 경멸했던 닳고 닳은 기성세대처럼 되지 않을 것이란 근거 없는 믿음을 갖게 된다. 한마디로 ‘나는 아직도 젊다’는 일종의 자기 최면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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