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포 사일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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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포 사일리지
  • 조남민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16.02.18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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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포 사일리지. 추수가 끝난 들녘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공룡알처럼 생긴 흰 덩어리를 이렇게 부른다. 곤포는 짚이나 건초 등을 압축했다는 뜻이고, 사일리지는 가축의 먹이로 쓰기 위해 발효제를 첨가하여 저장하는 풀을 말한다. 콤바인으로 벼를 수확하고 남은 볏단을 원형 베일러와 랩핑기로 이렇게 둘둘 말아놓으면 겨우내 가축의 먹이로 십분 활용된다. 논 한마지기에 보통 500kg짜리 두 덩어리 정도 나오는데 개당 몇 만원 선이라고 한다. 부수적인 농가 소득원으로는 환영할 일이나 아무렇게나 논바닥에 뒹굴기 일쑤여서 단정하던 겨울농촌풍경이 어수선하게 변해버렸다.

예전의 겨울 논바닥은 한없이 푸근했다. 벼베기가 끝나면 낟가리를 논둑 가까운 적당한 곳에 세워놓아 ‘형님먼저 아우먼저’의 돈독한 우애가 발휘되는 이야기의 바탕이 되었고, ‘동네꼬마 녀석들 추운 줄도 모르고 할아버지께서 만들어 주신 연을 날릴’ 때도 논바닥 한가운데 수북히 쌓아올린 짚토매는 든든한 바람막이이자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하루 종일 논바닥에서 놀다가 ‘탑새기’ 가득 묻은 몸으로 집으로 돌아오면 싸리 빗자루로 맞듯이 먼지를 털어야 했다. 부모님에게는 생활의 근원이 되고 아이들에게는 신나는 겨울 놀이터였던 논은 이제 더 이상 따뜻한 온기가 남아있지 않다. 구불구불 정겹게 걸어가던 논둑은 기계화경작로로 바뀐지 오래고, 바둑판같이 반듯반듯하게 변한 절대농지는 더 이상 동네 꼬마들이 다가갈 수 없게 되었다. 그저 몇 개의 공룡알 만이 휑하니 논바닥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논이 삭막한 곳만은 아니다. 봄 철 모내기가 끝난 들판에서 자라는 초록의 벼는 푸른 산만큼이나 싱그러움을 전해주고, 한 여름의 더운 열기를 이겨낸 늦가을의 벼는 황금물결의 장관을 아낌없이 제공해 준다. 

사람 키보다 훨씬 큰 갈대숲을 지나 노을빛이 아름다운 S 라인의 가을 습지를 보기위해선 순천 생태공원의 용산전망대에 올라야 하는데, 그 장쾌한 풍광에 앞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생명의 땅 순천만’이라고 논바닥에 크게 써 있는 글귀다. 이것은 노오란 들녘 가운데를 콤바인이 가로질러 가면서 음각 효과를 낸 것으로, 벼베기를 하나의 예술로 승화시킨 대형 미술작품에 가깝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보령을 지나다 보면 곤포 사일리지로 ‘만세보령’이라는 글귀를 커다랗게 만들어 놓은 논을 발견하게 된다. 문화예술감각이 있는 논주인의 뜻이든 행정의 일환이든간에 길을 지나는 사람들은 저 글귀를 한번 씩 마음에 새겨 보게 된다.

지방도 70호선이 통과하는 청양군 운곡면 일대에는 신랑 각시로 둘씩 짝지어진 곤포 사일리지 부부를 쉽게 만날 수 있다. 지역 미술가들의 도움을 받아 흰 사일리지 표면에 페인팅 작업을 한 것인데 주로 버스 승강장 주변에 설치하여 지나는 사람마다 미소를 머금게 만든다. 겨우 곤포 사일리지 몇 개로 한 마을의 인정과 여유가 느껴지게 만든 것이다. 아무렇게나 논바닥에 뒹굴며 긴 겨울을 지내게 하는 것과는 천지차이가 난다. 곤포 사일리지는 설치미술의 재밌는 소재가 될 수 있다. 지역의 사소한 것에라도 문화예술인들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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