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주변을 둘러보면 입버릇처럼 인문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시대는 왜 인문을 이야기 하는가? 인문이란 사람에 관계된 학문이다. ‘사람에 관계된’이란 인간이 인간답게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말함이다. 그럼 우리는 왜 인간다움과, 인간다운 행복에 관심이 쏠리는가? 그동안 우리는 인간답지 못했으며, 행복하지 못했는가? 아니다. 다만 인간다움과 행복에 대한 가치기준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산업의 고도화가 사회적 화두일 때 우리는 산업발전이란 미명 아래 묻혀있던 자아에 대한 인식이 대두되면서 개인의 가치와 개인의 행복을 추구해 왔다. 산업문명이 사회적 가치의 1순위에 있으면 모든 것이 경쟁구도로 바뀌게 된다. 내가 너보다 더 행복해야 하고, 풍요로워야 하며, 능력이 뛰어나야 한다. 그것이 당연한 논리로 통용되는 시대를 우리는 지나왔으며, 그런 논리는 아직도 이 사회의 대부분에서 진행형이다. 하지만 개인의 가치와 개인의 행복구현을 위한 개인주의의 팽배 속에서 우리는 무엇인가 결핍을 느끼게 된 것이다.
왜 그럴까? 답은 지극히 단순하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전통적으로 ‘나’보다는 ‘우리’의 가치를 높이 여겼던 정서에 개인주의로는 해결할 수 없는 목마름이 늘 존재했던 것이다. 그 목마름의 한계점에서 이제 ‘우리’라는 가치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우리란 ‘너에게 영향을 주는 나와 나에게 영향을 주는 너’의 관계이다. 너에게 영향을 주지 않고, 너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고, 적당한 무관심이 필요하다. 그러기에는 우리의 가슴이 태생적으로 너무 뜨거웠던 것이다. 개인주의 사회에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없다. 끊임없이 경쟁해야하는 사회구조 속에서 피로를 느낀 우리는 경쟁이 없는 곳을 찾아 밤거리를 헤매 다녔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경쟁이 없는 곳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문득 깨닫게 된 것이다. 나와 나만의 행복이 아니라 우리와 우리의 행복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러기 위해서는 양보와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내가 양보하고 배려하는데 너는 양보하고 배려하지 않는다. 그러니 언제나 상처를 받는 건 먼저 양보하고 배려하는 나인 것이다. 그렇게 상처받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가고, 그렇게 상처받은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면서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늘 입버릇처럼 말하던 ‘우리’가 정말 ‘우리’인가? 정말 ‘우리’가 ‘함께’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출발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우리’란 무엇인가? ‘함께’ 산다는 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일. 그곳에서 우리는 인문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여기저기 인문강좌를 찾아다니고, 나의 삶을 풍요롭게 해 줄 무엇인가를 열심히 배우러 다니지만, 갈증은 여전히 남아있다. 언제쯤이면 이 갈증이 해소될까? 답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우리 선조들이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이제는 돌아가, 그것을 실천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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