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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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선비
  • 이현조<문화in장꾼·시인·주민기자>
  • 승인 2016.12.01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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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 있는 사(士)와 어진 사람은 살기 위하여 어진 덕을 해치지 않고 목숨을 버려서라도 어진 덕을 이룬다.” -공자, “사(士)가 위태로움을 당해서는 생명을 바치고, 이익을 얻게 될 때에는 의로움을 생각한다.” -장자, “일정한 생업이 없어도 변하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은 사(士)만이 할 수 있다.” -맹자.

‘선비’라는 어휘는 기록상으로 ‘용비어천가’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세종은 자신의 여러 유교적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현실화시키는 과정에서 선비를 ‘학문적으로 뛰어나고 도덕적으로 어진 인물’을 지칭하는 의미로 재정의하여 사회적으로 반포한 것이다. 이를 통해 세종은 조선의 인재들에게 자신이 재정의한 선비를 이상향으로 삼고 추구하도록 하였다. 태종의 강력한 왕권강화정책으로 인해, 무를 갖춘 인재보다 문을 갖춘 인재가 상대적으로 더 등한시되는 경향이 남아있어 이를 해소하기 위해 문을 갖춘 인재를 장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선비가 관직에 나아가면 위로는 임금을 섬기고, 아래로는 백성을 돌봐야 하는 책임이 있다. 하지만 선비는 임금에게 무조건 복종과 충성을 하지 않았다. 선비는 임금과 의(義)로 관계를 맺기 때문에 언제나 자신이 맡은 직책에 따라 임금의 역할에 대해 성찰하여야 한다. 임금에게 잘못이 있으면 아뢰어 바로잡고, 직책이 도리에 합당하지 않으면 물러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선비는 나아가기를 어려워하고 물러서기를 쉽게 생각해야 하며, 부귀의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불의에 대한 비판 정신을 확보해야 한다. 선비로서 평생 과거시험을 보지 않거나 벼슬에 나가지 않는 사람을 흔히 ‘처사(處士)’라 한다. 처사는 관직에 나간 선비보다 더 존경을 받았다. 처사 중에서도 학문에 조예가 깊어 후생을 많이 가르치고 바른 도리를 제시하는 사람을 ‘선생(先生)’이라고 불렀다. 선생은 벼슬에 나간 사람의 호칭인 ‘공(公)’에 비해 훨씬 높은 존중을 받았다.

임금에게 잘못이 있으면 먼저 벼슬에 있는 선비들이 간언하고, 그래도 바로잡히지 않으면 유생과 처사들이 상소하거나, 궐 앞에 꿇어앉아 목숨을 걸고 직언하였다. 이것이 요즘 데모 또는 시위라고 말하는 것이다. 데모나 시위의 방법이 달라지면서 최근에는 ‘촛불집회’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어쨌든 그 의미는 같은 것이다. 며칠 전 유림지도자연수에 다녀왔다. 강의가 중반을 넘어서자 여기저기 잡담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강의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강의가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자 더욱 가관이었다. 참석자에 비해 식당좌석이 부족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불평과 불만의 목소리가 번져 나왔다. 시대의 ‘선생’이 되어야할 사람들에게서 ‘선생’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 시대의 유림이 바로서지 못하면 누가 ‘위로 임금을 바로 섬기고, 아래로 백성을 제대로 돌보는’가? 초등학생이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고, 수능을 마친 고등학생들이 광화문으로 달려가 촛불을 밝히는 이 시대에 유림들은 어디에 있는가?

오늘날 어지러운 정치현실과 사회적 가치혼란 등의 문제로부터 이 시대의 유림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이 보도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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