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삶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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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삶은 계속된다
  • 윤여문<청운대 교수·칼럼위원>
  • 승인 2016.12.16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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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효신이를 처음 만난 것은 유학시절 어느 강의실에서였다. 수업이 몇 주 가량 진행되었음에도 우리가 서로 눈만 마주쳤지 이렇다 할 대화가 없었던 이유는 짙은 눈썹과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그를 나는 ‘집 깨나 사는 동남아 출신 학생’이라고 단정했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그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마당쇠처럼 묶고 다녔던 나를 일본 학생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상대가 록음악에 심취해 있을 것이라는 확신과 같은 듯 다른 애매한 피부색이 서로를 경계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어느 날, 수업 내용 중 일부를 이해하지 못한 나는 그에게 영어로 물어봤고 그는 친절히 대답해 주었다. 몇 번의 영어 대화가 오고간 후, 우리가 오천년 역사를 가진 한민족이란 것을 알고 한참을 웃었다. 중학생 시절,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 간 이후 단 한 번도 한국을 방문할 기회가 없었다는 그는 내가 알고 있는 누구보다 의리 있고, 유머러스하고, 근성 있는 동시에 따뜻한 배려심을 가지고 있는 친구였다.

이렇게 하여 효신, 상민, 현부, 그리고 나는 모든 유학생들이 부러워하는 동갑내기 유부남 4인방이 되었다. 우리는 매일 새벽 두 시부터 동트는 여섯 시까지 음악 스튜디오에서 두더지처럼 녹음했고, 음악 장비들의 장단점을 공유했고, 주말을 함께 보냈고, 태국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밥값은 예외 없이 가위바위보로 결정했는데 고집스럽게도 (혹은 바보스럽게도) 매번 주먹을 내는 현부를 위해 나머지 우리 셋은 보자기를 냈다. 현부가 밥값을 계산하는 동안 나는 그의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당신 남편이 오늘도 주먹을 내어 밥값을 치렀다’고 일러바치곤 했다.

매 학기 제일 긴장되는 기말시험이 끝나는 날 밤엔 효신이 집에 모여 왁자지껄한 맥주 파티를 했다. 우리는 겉모습만 고풍스러운 이 낡고 오래된 건물의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들어가 누가 칠했는지 모를 우스꽝스러운 초록색 거실 벽 앞의 긴 테이블에 앉아 혀가 꼬부라질 때까지 술을 마셨다. 미리 사 온 안주가 바닥나면 용근이는 마른안주를 누런 쟁반에 성의 없이 담았고, 현부는 쥐포를 느끼한 기름에 튀겼지만, 효신은 텅 빈 냉장고를 샅샅이 뒤져 몇 개 안되는 재료만으로 맛있는 소시지 야채볶음을 뚝딱 만들어 내왔다. 이 친구들과 마시는 맥주와 정체 모를 안주는 항상 특별했다. 같은 나이, 같은 전공, 같은 생활 패턴, 그리고 같은 유부남이라는 공통적인 사실 이외에도 무언가 보이지 않는 연결 고리가 있음을 느꼈다. 이들만 옆에 있다면 맥주를 뜨거운 정종처럼 데워 마셔도 충분히 행복할 것이 틀림없다.

졸업 후, 상민은 한국으로 돌아왔고, 현부는 보스턴에 남아 있었고, 나는 뉴욕에서 대학원 공부를 시작했고, 효신은 음악 생활의 첫 발을 LA에서 내디뎠다. 먼 거리 덕분에 간간히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효신에게서 무거운 목소리와 탄식이 잦아졌다. 아마도 LA에서의 일이 생각만큼 잘 풀리지 않았는지 좀처럼 힘든 내색을 하지 않던 그가 어려움을 자주 토로했고 나는 그의 푸념을 묵묵히 들어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부모님이 계시는 애틀랜타로 돌아가 지역 라디오 방송 관련 일을 시도했지만 그 마저도 힘에 부쳤는지 “나 이제 음악 그만 두련다.” 그는 거짓말처럼 그렇게 음악을 내려놓았다. 음악이라는 것이 다른 전공과는 다르게 무조건적인 열정과 지독히도 긴 인내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친구의 결정은 나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지만 내가 섣불리 해줄 수 있는 말은 전무했다. 그 결심까지 친구가 감내했을 수많은 음악적 고민과 현실에 대한 절망과 미래에 대한 안간힘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짐작하니 몹시 안타까웠다.

현재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그는 얼마 전 전설적인 기타 하나를 장만했다. 이 매력적인 빨간색 기타를 두고 그는 “카멜레온 같은 여자”라며 기뻐했다. 작가 장정일의 말처럼 은행원이 성공한 소설가가 되고, 영문학 전공 학생이 훗날 기업 회장이 되는 요즈음, 전직 뮤지션이 법률사무소에서 자신의 능력을 펼친다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상상해 보라. 15년 전의 록기타리스트 김효신이 빨간색 ‘카멜레온’같은 기타를 메고 멋진 음악을 연주하는 모습을.

<이 보도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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