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에서 ‘에로스’를 다시 생각하기
상태바
‘피로사회’에서 ‘에로스’를 다시 생각하기
  • 김상구 칼럼위원
  • 승인 2017.09.13 09: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간이 동물의 길을 벗어나면서부터 본능적 욕망을 억제하고 문명을 건설했다고 프로이트는 진단했다. 풍선의 한쪽 끝을 누르면 다른 쪽이 불거지듯, 인간의 ‘에로스’(eros)에 대한 억압은 ‘타나토스’(Thanatos 파괴적 본능)를 수반했다. 그러나 허버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는 ‘억압 없는 문명은 정말 불가능할 것인가’라는 회의적 질문을 던졌다. ‘프로이트 이론의 철학적 연구’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문명’은 프로이트 이론을 충분히 설명하면서도 인류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았던 프로이트를 넘어서려고 했다. 인간이 노동은 하지 않고 본능에 충실할수록 풍요롭게 살기 힘든 일이기는 하지만, 재화가 넘쳐나는 사회에서도 왜 인간은 과잉노동을 하지 않을 수 없는가에 마르쿠제의 시선은 머무른다.

유태인인 마르쿠제가 독일에서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해 바라본 모습은 이미 재화(財貨)가 넘쳐나고 있었지만 대중들은 과잉노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대중들은 과잉노동과 자본주의 질서를 비판 없이 수용하고 있었다. 대중들에 대한 ‘부드러운 조작’을 통해 거대 자본가들이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반면, 노동자들은 적은 월급으로 반복되는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마르크스와는 달리 마르쿠제는 자본주의에 순치(馴致)되어 비판성을 상실한 노동자들에게 혁명의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했다. 비판성을 상실한 채 자본주의 사회에 순응하여 가는 사람들을 가리켜 ‘1차적 인간’으로 그는 명명했다. 거대자본에 의한 기술과 문명의 발전은 대중을 행복하게도, 똑똑하게도 하지 못하며 그들의 고통도 줄여주지도 못한다고 본 것이다.

억압을 통한 문명의 귀결이 이렇다면 그는 에로스의 해방을 통한 새로운 대안의 모색이 필요하고, 그것은 “지배적인 현실에 대한 절대적 거절”이라고 보았다. 현실 속에서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되어야 하는지 명확한 답을 그는 제시하지 않았지만, 문명의 규범에 순종해 그것에 타협하기를 거부하는 철학, 문학, 예술에서 그 가능성을 보았다. 리비도(Libido)가 승화될 때 인간성의 해방도, 찬란한 문명도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리비도에 대한 일방적인 억제, 그것의 실현 불가능한 상황의 연속은 ‘타나토스’의 증가를 가져올 뿐이다. ‘노마드’적인 삶을 살아가는 떠돌이 같은 사람들이 인간의 본능적 억압을 해체하는 역할을 한다. 이들이 인문학을 하는 자들이며 스티브 잡스도 이곳에서 문명 발전의 가능성을 찾고 싶어 했다. 마르쿠제도 생산성이라는 낱말이 덜 중요하게 들릴 때, ‘지배적인 현실원칙’이 부정될 때 실러(Schiller, 독일의 시인)가 말하는 ‘유희하는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지금, 마르쿠제의 눈으로 우리의 현실을 둘러 볼 때, ‘에로스’의 주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 사랑조차 실현가능하지 않은 젊은이들이 많다. 직장을 얻기 위해 많은 스펙을 오랜 시간 쌓아야하고, 간신히 직장을 얻었어도 오래 다닐 수 있는지 불안감을 떨쳐낼 수 없다. 이들이 사랑하고 아이를 낳고 미래를 설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OECD국가 중 출산율이 최하위를 맴돌고 있다. 프로이트의 말처럼 본능의 억제가 문명의 출발일 수 있지만 에로스의 종말은 가족과 국가를 구성하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극단적인 에로스의 억압이 문명을 파괴할 지점에 이른 것이다. 베를린 예술대학교 한병철 교수의 말처럼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모두가 지쳐버리는 ‘피로사회’에 도달했다.

사랑을 위해 목숨을 버렸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의 나이는 14살이 채 되지 않았고, ‘춘향전’의 춘향이도 10대를 벗어나지 않았다. 지금 우리는 30세가 넘어도 결혼해 아이를 낳을 수 있는지 불투명하기만 하다. 거대한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서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모든 조직들이 경쟁! 평가! 경쟁을 외치고 있다. 이러한 피로사회, 과로사회에서 벗어나는 길은 마르쿠제의 말을 다시 빌린다면 “지배적인 현실에 대한 절대적 거절”일 것이다. 어떻게?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은 “사유(思惟)하라”고 말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