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산홍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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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산홍엽
  • 조남민 주민기자
  • 승인 2017.11.18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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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산홍엽(滿山紅葉), 온 산에 단풍이 들어 붉게 물들어 있는 모양을 뜻하는 말이다. 홍성은 지금 황금빛 들녘의 추수를 끝내고 스산한 가을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다. 홍성읍을 기준으로 남쪽의 오서산, 서쪽의 백월산, 북쪽의 용봉산, 동쪽의 대흥산 어디를 바라보나 형형색색의 단풍이 물들어 있고, 파란 하늘을 머리에 이고 있는 마을 어귀의 커다란 은행나무는 노랗게 물든 채로 가끔 바람이 불 때마다 한 잎 두 잎 살랑대며 도로를 샛노란 이불로 덮어주고 있다.

공룡알처럼 하얗게 둘둘 말린 채로 논바닥에 쌓여있는 곤포사일리지는 어느새 겨울이 다가왔음을 알리고 있다. 흔하디 흔한 가을날의 풍경에서 우리는 잠시나마 바쁜 일상을 내려놓는 여유를 부린다. 이 만추(晩秋)속에 있는 나는 지금 행복하다. 하지만 저 나목(裸木)도 그러할까? 붉게 물드는 나뭇잎은 세상에 둘도 없는 자연의 아름다운 향연이지만, 나무로 보면 제살 깎아내는 아픔에 다름 아니다. 봄과 여름 내내 무럭무럭 자라던 나무는 찬바람 부는 가을이 오면 겨울나기를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대부분의 수분과 영양분을 소비하는 나뭇잎을 타깃으로 하여 줄기와 가지로 부터의 공급라인을 차단시킨다. 경제가 어려울 땐 긴축재정을 시작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뿌리에서 수분을 공급받지 못하게 된 나뭇잎은 엽록소가 파괴되면서 결국 나무로부터 떨어지게 돼 말 그대로 추풍‘낙엽(落葉)’이 된다. 일 년 내내 붙어있던 나뭇잎을 떼어내는 나무의 심정도 아련할 것이다. 하지만 내년을 기약하려면 결국 몸통이 살고 봐야 할 것 아니겠는가. 영양분이 차단되는 과정에서 초록색 나뭇잎은 그 동안 보이지 않던 노랑이나 빨강 같은 색소들을 드러내어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 만든다.

빨갛게 물든 단풍을 보며 나무의 의연한 판단에 고개가 숙여진다. 수백 년의 생존을 위해선 주변의 수많은 이파리를 해마다 정리해야만 한다. 자신은 비록 힘들고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이 과정에서 나타난 단풍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하지 않는가. 아마도 나무는 그것으로 충분한 위안을 삼을지도 모른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수십 년을 살아오면서 그 동안 정리 못한 일들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시작은 요란했지만 결론을 내기는커녕, 어떻게 해야 할 바도 모를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닐진대 차일피일 미루기만 한 일이 무릇 기하일까.

우리도 나무와 같이, 인생의 가을에 접어들면 겨울을 미리 준비해야 할 것이다. 나와 관련 없는 불필요한 여러 일에 끈질기게 매달리지는 않는지, 끝도 보이지 않는 일에 막연히 에너지를 쏟고 있지는 않는지, 이 일이 오래도록 지속되리란 보장은 있는 것인지 등에 대한 겸허하고 진지한 성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아직도 고치지 못하고 있는 잘못된 습관, 도저히 이뤄지지 않는 일에 대한 미련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

이 같은 과정을 수행하면서 우리는 나무와 같은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나의 주변에 있는 것들이 아름다운 색으로 채색되고, 나에 대한 평가도 달라지며, 장차 나의 미래도 보장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언제나 여름일 것이라는 생각은 가을엔 버려야 한다. 지천의 낙엽과 만산(萬山)의 홍엽에서 정리의 미덕을 본다.

조남민<홍성문화원 사무국장·주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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