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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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보았습니다
  • 만해 한용운
  • 승인 2010.03.12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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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음으로 추수(秋收)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야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는 인권(人權)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貞操)냐."하고 능욕(凌辱)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化)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 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永遠)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1926년 발표 시집 <님의 침묵> 수록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1879.8.29 ~ 1944.6.29)


독립운동가, 승려, 시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大韓民國章) 추서(1962년)

독립운동가, 승려, 시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大韓民國章) 추서(196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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