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비었던 논에 물이 가득하다
아무리 메마른 논이라 하더라도
출렁이는 물이 가득하다면 푸르러진다
그렇다, 생명을 길러 가는 푸른 양수
이 세상을 만나기 전에 나는 이미
양수 속에 깊이 빠져 있었다
고여서 나를 자라게 하고
고여서 나를 숨쉬게 하고
고여서 나를 찾게 한, 그 푸진 물
저 논에 넘치게 고여
하늘이 내려와 빠져버린 까닭을 이제야 알겠다
허기로 바라보는 라면물 끓듯, 물이여,
머잖아 만복(滿腹)처럼 기다리던
한 알의 씨가 되어 내 살을 만들어 갈 지니
아, 양수를 터뜨리며
내 어머니의 자궁, 그 심해를 마악 벗어나면서
우주를 향해 내지른
내 첫 울음소리가 출렁이고 있다
무논 가득한 바람결에
무수히 쏟아져 내린 햇살의 충만이
지상의 하늘을 펼치어 놓고 있다
구재기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한국본부 회원
(사)한국시인협회 기획위원
충남시인협회 부회장
시집 <가끔은 흔들리며 살고 싶다>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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