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한우 축산가족에게 바치는 오마주(hom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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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한우 축산가족에게 바치는 오마주(hommage)
  • 홍주일보
  • 승인 2020.07.0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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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홍성한우는 외국산 쇠고기 수입 개방 등 힘든 여건 속에서도 초일류 명품 한우브랜드로 굳게 자리를 잡았다. 홍성한우는 맑은 물과 좋은 땅이라는 청정한 천혜의 자연환경에서 정성을 다해 생장발육을 조화시킨 지역 축산농가와 축산업 관계자들의 피와 땀과 눈물의 결실이다. 숱한 어려운 시기들을 딛고 생태학적으로나 생물학적, 또는 해부학적으로도 더없이 우수한 소들을 묵묵히 키워온 우리들의 할아버지, 아버지들의 헌신과 노력에 무한한 존경과 찬사를 보낸다. 

오래 전 그 때의 집안 형편은 참으로 궁핍했다. 1960년대 초반 우리나라 국민소득은 100달러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가난을 탓하지 말자. 가난을 탓하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하고 살았다. 어떤 노래의 가사처럼, 열심히 살다보면 좋은 날들이 오리라 믿었다. 

소 배내기, 또는 소 배내먹이는 남의 집 송아지를 키워주고 대신 그 소에서 난 새끼를 받는 것을 말한다. 소 배내기는 소를 길러주고 그 소가 새끼를 낳으면 첫 새끼는 주인 소유, 둘째 새끼는 길러 준 사람이 갖게 되는 과거 농촌 고유의 풍습이다. 가난했던 그 시절, 많은 농가들은 그런 방법을 통해 소들을 얻어 키우고 나중에 시장에 내다팔아 커가는 아이들을 교육시켰다. 그 때는 많은 농가들이 사실상 소장수를 겸업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멀리 대도시까지 나가서 소를 파는 일도 많았다. 인근에도 소시장과 도살장이 있었으나 한 푼이라도 값을 더 받기 위해 멀리서 열리는 장날들을 찾아 소를 몰고 밤새 걷는 일도 많았다. 해방 전후에는 소 1마리를 팔면 논 1마지기 정도를 살 수도 있었다고 한다. 

예전에 농촌에서 자란 아이들은 대부분 송아지를 키웠다. 어떤 때는 한꺼번에 송아지 2마리를 키우기도 했다. 송아지를 잘 키워서 우시장에 나가 팔면 돈이 많이 남았다. 우리는 송아지를 키우면서 생각했다. 이 송아지를 잘 키워 나중에 어린 동생들 공부도 시키고, 장가도 가고, 농사지을 땅도 사서,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 궁핍과 굶주림 속에서도 송아지를 잘 키워 우리는 부자(富者)가 되고, 입신양명하여 효도를 하고 나라에 충성하고 싶었을 것이다. 

송아지를 잘 키운다는 것은 하나의 도전이었고 희망이었다. 우리들의 소년기는 송아지와 함께 자라고 커가고 있었다. 송아지는 우리들의 작은 영혼이었고, 함께 크는 우리들의 몸이었다. 송아지는 우리가 살아가는 땅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기대를 그리 배반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당시 송아지 키우는 일은 소중한 사업, 하나의 벤처기업이었다. 현대그룹 창업자 정주영(1915~2001) 회장의 경우 소 판돈을 집에서 갖고나와 자수성가, 결국 대재벌까지 되었다는 유명한 일화까지 전해진다.  

어느 해인가. 송아지 풀 먹이러 나갔다가 갑자기 내린 엄청난 소나기로 하천에 물이 불어 송아지가 둥둥 떠내려갔다. 어쩔 줄 몰라 소리를 지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다행히도 떠내려가던 송아지가 구사일생으로 물 밖으로 나온 일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일이다. 

소를 먹이기 위해 산에 갔다가 잠시 낮잠을 자는 사이 소를 잃어버리는 일도 있었다. 담장도 없이 살던 그 때는 밤중에 누군가가 소를 훔쳐가는 일도 없지 않았다. 농촌에서는 그 때나 지금이나 소는 가장 소중한 재산목록의 하나다. 어쩌면 사람값보다 더 나간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소는 가축으로서도, 농사일에서도, 중요했다. 우리 농사의 근본은 참으로 소에 있었다.


“일어나 소 먹이니 효성(曉星)이 삼오로다
들을 바라보니 황운색도 좋고 좋다
아마도 농가의 흥미는 이뿐인가 하노라.”


-김진태(생몰 미상, 조선 영조 때의 가인)


명상(名相) 황희(1363~1452) 정승의 일화처럼, 예전의 선비들은 논밭 가는 농부에게 일하는 소의 우열을 큰 소리로 묻지 않았고, 《맹자》에서는 제사에 쓰기 위해 끌려가는 소를 보고, 양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이른 바 역우지인(易牛之仁)의 고사를 새겼다.

춘추시대 위나라 영척은 소뿔을 두드리며 소 먹일 때 부르는 <반우가>를 불렀다. “요순(堯舜)을 만나지 못해 무명옷 입고 소를 먹이나니, 긴긴 밤은 언제 밝아지려나.” 노자는 검은 소를 타고 함곡관을 넘다가 <도덕경>을 전했고, 군웅이 할거하던 수나라 말엽의 재사 이밀(582~618)은 젊은 날 소를 타고 가며 소뿔에 <한서>를 걸어놓고 읽었다고 한다. 

한 농가에서는 소가 송아지를 낳자, 농부는 아들에게 두 손으로 그 송아지를 아침·점심·저녁·밤중 등 하루 수십 번씩 들게 했다. 이것을 몇 년을 하다 보니 송아지가 커가면서 아이의 힘도 커졌다고 한다. 습관이 성품을 이룬다(習與性成)는 《장자》 <사물잠>에 나오는 교훈이다. 우리는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거의 매일 송아지를 산에 끌고 가 꼴을 베어 먹이면서 우리들의 몸도 함께 건강해질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농촌의 삶은 아침 일찍 일어나는 데서 시작된다. 아침은 언제나 신선하고 찬란하다. 소들은 외양간에서 하루의 시작을 알리고, 닭들은 모이를 찾아 분주히 움직이고, 햇살은 농부들의 잠을 깨운다. 대학자이자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1629~1711) 선생의 유명한 시조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놈은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은 언제 갈려 하나니.”

 

사람은 모름지기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이 좋다. 특히 농부는 이른 아침에 들에 나가야 하고 이슬을 헤치며 걸어가는 것이 습관이 돼야 한다. 새벽이슬을 바지에 묻히고 밟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상쾌하게 하는지 부지런한 농부들은 알고 산다. 그러나 이런 시조도 생각난다.

“풍로에 국 끓고 까치도 울고 아내는 부엌에서 간을 맞추고,
아침 해 높이 떠도 따뜻한 이불,
세상일 다 잊고 잠 좀 더 자자.”

-《대동시선》 <신흥즉사>.

어떤 때는 이런 말들이 좀 더 인간적인 느낌이 나는 것도 사실이다. 
선농일여(禪農一如). 사농일치(士農一致). 호미와 괭이를 들고 일하는 우리 농축산업인들의 거룩한 노동이 고승대덕의 깨달음이나 선비의 공부와 큰 차이가 없다는 우리의 오래된 미덕과 전통이다. 일일부작(日日不作), 일일불식(日日不食). 매일매일 일하지 않으면 하루하루 먹지 말라는 백장(720~814) 등 대선사들의 귀한 가르침도 소와 함께 땀을 흘리며 논밭에서 일하던 우리 조상들을 격려하는 심오한 말씀이다. 문화를 가리키는 Culture는 ‘땅을 경작한다’는 뜻에서 나왔다고 한다. 식량의 대량생산을 가능케 한 농경의 시작과 야생동식물의 가축화와 작물화는 인류가 경험한 가장 근본적이고 위대한 혁명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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