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사일기’에 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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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사일기’에 취해
  • 이원기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0.08.27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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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관계는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이 최상책인가? 양국 교류의 긴 역사를 보건대, 한국의 입장에서는 베풀고도 보따리마져 빼앗긴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배은망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는 대마도(쓰시마)와의 통상관계이다. 그들은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조선과 일본 본토 양쪽을 동시에 속이거나 두 나라 가운데 힘의 우위라고 느낀 나라의 편에 서서 반대편 국가를 속여 왔다. 조선은 그들이 끈질기게 매달리는 통에 몇 만 가마의 쌀과 비단과 면직물을 주면서 달랬다. 그 결과 무엇이었던가? 임진왜란 7년간의 참화를 입는 것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이제는 양국의 역사가들이 허구라고 결론지은 삼한 시대의 신공황후의 한반도 남부침략 및 식민지 설치까지를 사실로 친다면, 일본의 침략사는 매우 길다. 신공황후 재위시절이 《삼국지》의 조조가 활약하던, 후한 말기 헌제 때이니까 말이다.

게다가 왜구는 신라 내물왕 시기에 신라를 침략하기까지 했다.

결국 그들의 불법 침략을 징치한 사실을 광개토대왕비에 기록돼 있다. 1864년의 명치유신 직후 비석의 기록 자체마저 변조해 조선침략의 발판으로 삼은 일본이니 무슨 말을 더 하랴! 그러나 지난날의 원한관계만 집착할 수는 없는 일이다. 잠시 후에 약술하겠지만 조선 통신사의 책임자로 18세기 후반에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조엄의 일행 중 한 사람이 대마도의 통역인에게 살해당한 엄청난 사태 속에서도 말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조일 양국간의 관계가 어그러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그 한마디는 그 자신의 막중한 책부(責付)가 무엇이고. 그 당시 양국간의 가장 중요한 현안이 무엇인지를 대국적인 시각으로 꿰뚫고 있음을 보여준다. 훌륭한 관료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조엄은 1763년 8월 3일, 500명 가량의 수행원들을 이끌고 양재역을 출발해 이듬해 7월 8일 경희궁에 도착한다. 1년 가까운 사행기간 동안 작게는 뱃멀미에서부터 거센 풍파로 생사가 오락가락한 일들에 이르기까지 온갖 난관이 있었지만.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도훈도(하급 장교) 최천종이 대마도의 통역관에게 살해당한 일이었다. 그 사건의 전말을 약술하면 이렇다. 1764년 4월 7일 새벽, 최천종이 닭이 운 다음 잠자리에 들기 직전에 그날의 보고서를 쓰고 난 직후 잠이 들었는데, 가슴이 답답해 발버둥치다 눈을 떠보니 웬 놈이 가슴팍을 움켜쥐고 칼을 들고 있다가 최천종의 목을 찔렀다는 것이다.

이에 최천종이 ‘도둑이야’ 하고 소리치자 범인은 재빨리 도주를 했다는 것이 피를 토해가면서 최천종이 한 말이었다. 결국 그는 응급 치료를 받았으나 아침녘에 사망하고 만다. 조엄은 여기서도 훌륭한 관리답게 일을 처리했다. 결코 흥분하지 않고 사리를 따져가며 살인사건을 유야무야로 슬그머니 넘어가려는 왜인들의 술책을 완벽하게 제압하고 끈질기게 추긍하고 요구하며 한달가량을 버틴 끝에 살해범 스즈키 덴죠를 잡아낸다. 또한 누차에 걸친 조사·심문 끝에 오사카 지역의 행정, 재판, 형벌의 책임자들이 조선관리의 품격있고 사리에 합당한 요청에 부응해 범인을 끝가지 은폐시키려던 대마도주의 속셈을 꾸짖으며 범인을 목 베었다. 일본은 불교 중심 국가답게 호화롭기 짝이 없는 사찰이 도처에 즐비하나, 조선통신사들은 천왕과 쇼군이 사는 에도(동경)까지 가는 동안 사찰에서 머무는 경우도 많았다. 독실한 불교국 일본이 주변의 침략이나 인명살상 문제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경우를 보여주는 사례를 조엄의 사행일지에서도 생생하게 느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우리가 여전히 일본을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이원기 <청운대학교 교수·칼럼·독자위원>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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