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만남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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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만남을 위해
  • 송경섭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1.04.22 08: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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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시골 마을 교회에 부임해 간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교우 심방을 하고 마을 분들을 찾아뵙고 인사를 나눴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에 노인 한 분이 술에 취하셔서 날 찾아오셨다. 

“왜 나를 찾아오지 않는 거요?” 

“교회마저도 나를 찾지 않으면 안 되는 거 아니요?”

알아보니 그분은 외딴집에서 혼자 사시는 분으로 한센병을 앓으셨던 어르신이셨다. 이 어르신이 외롭게 고립돼 사시다가 새로 부임한 전도사 소식을 들으신 것이었다. 동네 인사 다닌다는 소식을 듣고 전도사의 방문을 기다리셨던 것이다. 그냥 잊고 지내다가 그분이 돌아가셔서 장례식장에 가서야 후회를 하게 됐다. 생전에 교회 여선교회에서 반찬을 여러 번 해다 드리긴 했지만, 나는 말벗이라도 되어드리지 못한 것이 너무 죄송했다.

더러 교회에 와서 행패를 부리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사람은 예배 중인데 군용 대검을 가지고 위협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가스통을 터뜨리겠다며 막무가내로 시위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왜 불의한 정권을 비판하지 않느냐며 선지자적 사명을 망각하고 있다고 나를 비난하기도 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순수해야 할 교회가 왜 세상일에 관심을 갖느냐며 타락했다고 나를 비난하기도 했다.

언젠가 동네에서 폭력과 사기 전과로 유명한 분이 교회에 나오고 싶다고 내게 면담을 요청해왔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이 한 결 같이 그 사람을 경계하고 멀리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과의 만남을 내게 말렸다.

나는 망설이다가 그와의 만남을 미뤘다. 왜냐면 그 사람 때문에 정신적 충격을 받은 사람이 우리 교회에 있었고, 그가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공동체가 모든 사람들을 품을 수 있을 만큼 성숙해지기를 소망한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아픔과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스스로는 헤어 나오지 못한다. 개인에게 희생과 인내를 요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정당하지도 않다. 그러나 인간 사회의 어려움을 공동체가 함께 고통을 분담하는 것은 성숙하고 바람직한 일이다.

우리나라가 걱정스러운 것은 국민들을 갈라놓고 서로를 공격하는 정치현상이다. 그것이 지나치고 극단적이라 안타깝다. 이것이 고착화된다면 비극이다. 촛불이든 태극기든, 광화문이든 서초동이든 극단으로 흐른다면 우리 사회가 치유하고 회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다름이 역사발전을 위한 동인이 돼야지 퇴보와 침체로 가서는 안 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이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링컨이었다. 그래서 노 대통령이 직접 링컨의 전기를 쓰기도 했다. 링컨은 통합의 정치로 통일 대통령이 됐고 미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역사적 인물이 됐다. 

우리 문재인 대통령도 통합의 정치로 국민 화합을 이루고 통일의 초석을 놓은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기를 바란다. 그동안 남북 간에 획기적인 관계 개선을 이뤄 놓았다. 그런 정성으로 야당과 비판적인 국민을 존중하면 된다. 그렇게 되어서 역사와 국민에게 사랑받는 대통령으로 남게 되기를 바란다. 

화해와 통합 그리고 전진을 위해 우리 공동체가 움직여야 한다. 대한민국은 역사적으로 대강 살아서는 안 되는 민족이고 나라이다. 식민지배와 동족상잔의 전쟁, 분단의 아픔, 지독한 가난, 군사독재 등 고난으로 점철된 역사를 지내온 나라이다.

아직 이 고난에서 해방되지 못했다. 조국의 통일이 남았다. 그 하나 됨을 이루기 위해서, 먼저 우리 안에서 하나를 이뤄가야 한다.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완수하면 평화를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민족이 될 것이다.

쉽지 않겠지만 미국과 중국의 대결 구도를 상생과 협력의 국제질서로 바꿀 수 있는 지도자가 우리나라에서 나오길 바란다. 힘의 논리가 아니라 평화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질서를 만들 사상가, 실천가가 한반도에서 나오길 소망한다.

예수께서는 의도적으로 12제자를 선택하시고, 먼저 제자들 안에서 하나 되도록 하셨다. 세리 마태는 로마 식민지 시대에 로마에 빌붙어 동족을 수탈하는 일을 하던 사람이었다. 열심당원 시몬은 로마에 저항하는 독립 운동가였다. 세리를 만나면 최소한 침을 뱉거나 칼로 찌를 수도 있는 사람이 열심당원이었다. 가룟 유다는 예수를 팔아넘긴 배신자였다.

예수께서는 그런 사람들로 제자 공동체를 만드시고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 그런 제자들을 똑같이 사랑해주셨다. 서로 원수였던 제자들이 그런 예수의 사랑에 감동받고 그들도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됐다. 그리고 세상을 사랑의 공동체로 만드는 일에 나섰다.

우리도 그랬으면 좋겠다. 남한과 북한이 그랬으면 좋겠다. 여당과 야당이 그랬으면 좋겠다. 태극기와 촛불이 그랬으면 좋겠다. 나도 그러기를 바란다. 

 

송경섭 <결성감리교회 목사 칼럼·독자위원>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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