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선비 대통령 박은식의 가르침 : 나라의 독립 회복, 양명학으로 무장해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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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선비 대통령 박은식의 가르침 : 나라의 독립 회복, 양명학으로 무장해야〈1〉
  • 노관범 <서울대학교 교수>
  • 승인 2021.07.29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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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식(1859~1925)은 한국 근대의 저명한 인물이다. 그는 대한제국기 한성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학부에 교육 개혁을 제안한 교육자였다. 대한제국기 민족 언론대한 ‘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의 주필로 활약한 언론인이었다. 그는 스위스의 빌헬름 텔 이야기를 국한문으로 번역해 ‘서사건국지’를 출간한 번역가였다. 서간도에 망명해 한국 고대에 관한 다양한 역사전기를 집필한 저술가였다. 

아울러 그는 대한제국기 평안도·황해도·함경도의 사회단체 서북학회를 이끌었던 사회운동가였다. 중국 상해에서 신규식과 협력하여 동제사를 이끌었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김치보와 협력해 노인동맹단을 이끌었던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생애 말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제2대 임시대통령이 됐는데,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난 한미한 시골 선비가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오른 것은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박은식을 가리켜 개신유학자라 칭하는 일이 많다. 유학자는 유학자인데 전통적인 유학자가 아니라 혁신적인 유학자였다는 뜻이다. 마치 서양 기독교가 종교개혁을 거쳐 천주교에서 개신교가 일어났듯이 박은식이 추구한 유학도 개신교와 닮은 유학, 그래서 개신유학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박은식은 주자학을 양명학으로 전환해 유교를 개혁하자고 주장했으니 개신유학자라는 칭호와 어울리기는 한다.

본래 개신유학자란 말은 한국 현대 역사학자 천관우가 조선후기 실학자를 가리킬 때 사용한 용어였는데 언젠가부터 조선후기 실학자를 계승하는 조선말기 유학자를 가리키는 용어로 지칭 대상이 달라졌다. 신용하의 독립협회 연구는 독립협회의 양대 세력의 하나로 조선후기 개신유학을 배경으로 하는 개명한 유학자를 거론하고 박은식과 장지연 같은 유학자를 예시했다. 이후 박은식과 장지연을 개신유학자라 부르게 됐는데 학술용어로서 얼마나 타당할지 근본적인 재검토의 여지는 있다.

그러나 개신유학자라는 말에 관계없이 박은식이 비슷한 시기 전통 성리학을 가르쳤던 유학자와는 상당히 다른 위치에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도 본래는 공자의 유학과 이를 철학적으로 체계화한 주희의 신유학에 깊이 경도돼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나이 마흔 이후 서울에 와서 새로운 해외 학설과 접하면서 사상의 변화를 경험하게 됐다. 물론 그는 영어나 불어를 할 줄은 몰랐지만 당시 대한제국 초기에는 한문만 읽을 줄 알아도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질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돼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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