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듦을 익숙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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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듦을 익숙하게
  • 최교성 세례자 요한 <홍주성지 전담 신부>
  • 승인 2022.03.03 08: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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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기고를 통해 진정한 삶은 새로운 삶으로 계속해서 거듭나는 것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 나이 들수록 우리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있다. 나이가 먹고, 그 후에는 죽음을 향해간다는 사실이다. 나이 듦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 세대는 이승이 전부인 세상으로 착각하게 만드는데 충분한 것 같아 보인다. 나이 들어서도 성형수술을 한다든가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다.

젊음을 유지하는 건강은 누가 봐도 좋은 것이다. 그러나 육체의 건강과 젊음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죽음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은 생활은 자칫 인생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착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나이 듦을 못 받아들여 우스꽝스러운 일을 자아내기도 한다. 또한 정신적인 무장을 하지 못하게도 한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절대 진리를 그리고 죽음을 제일로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이 과연 누구일까? 평소에 죽음을 한 번도 생각해 본적도 없고 준비해 본적도 없는 사람들이다. 죽음이 갑자기 현실로 들이닥치면 다들 당황하기 마련이다. 우리 어릴 적만 해도 동네에 한두 달에 한 번 정도 상여가 큰 도로변을 가로질러 지나갔다. ‘어어딸랑~ 어어딸랑~’하는 소리와 함께 상여가 지나가면 동네 사람들이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행길로 눈을 향했다.

나 역시 초등학생이었지만 그때마다 숙연해졌다. 그리고 동네 어르신이 죽음을 향해 집에서 고군분투(孤軍奮鬪)하며 아랫목에서 뼈만 앙상한 몰골로, 곧 돌아가실 것만 같은 육신을 다 드러내놓고 식구들과 함께 지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죽음을 지켜보며 살아갔다. 임종자 역시 평온해 보였다.

현재 가장 값비싼 호스피스(hospice)보다도 더 평온해 보였다. 그 시절엔 그렇게 거의 모두가 집에서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것 같았다. 죽음을 자신이 평생 살아왔던 안방 아랫목에서 생의 마지막을 편안히 맞이했다. 식구들이 모두 이 죽음을 우리네 삶의 일부분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동네마다 병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탄생과 죽음을 안방에서 맞이했던 것이다.

그런데 갈수록 죽음을 향하는, 죽음과 싸우는 생에서 가장 힘겨울 때 가족과 떨어져 중환자실에서 혼자 쓸쓸히 맞이한다. 물을 먹고 싶어도 못 마시며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보다도 더 심각한 것은 우리 일상과 주변에 죽음의 흔적을 죄다 다 없애버리고 있다. 산소나 장례식 납골당이 동네에 들어서면 모두가 반대를 하는 문화이다.

이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소외되고 왕따를 당하는 문화로 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일상이 깔끔하고 눈에 거슬리는 거추장스러움을 없애버리고 걱정거리를 해결한 듯 살아가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그런 문화가 우리 인간을 더 힘들고 고통스럽게 만든다. 한번도 머리에 스친적도 없고, 보기 힘든 죽음이 맞닥치면 그만큼 준비되지 못한 만큼 더 힘들어 한다. 이건 사실 죽음의 문화라고 할 수도 있겠다. 죽음이라는 진실을 외면한 결과이고 죄 값이다. 선진국들은 임종 때가 되면 가정으로 보내진다. 특히 일본은 임종 전에 집으로 보내진다고 들었다. 이게 맞다고 본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고 힘들고 이승과 이별하는데 쓸쓸히 혼자 중환자실에서 가는 문화는 그리 선진적이라 할 수 없다. 잘 먹고 잘 사는 현대인들보다 좀 못 살아도 나 어릴 때 안방에서 식구들 안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분들이 훨씬 더 행복해 보였다.

한 해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었다. 나이가 먹을수록 시간이 흐를수록 나이 듦과 죽음을 받아들이고 준비하는 시간들이 필요한 것 같다. 어찌 보면 이승은 저승으로 가기 위한 천국으로 가는 과정인지 모르겠다. 갈수록 이승이 전부인 사람들이 늘어가는 것 같다.

현시대, 이 세상의 주류이기도 하다 사람을 살리는 문화와 인문학이 살아야 할텐데 말이다. 인간은 죽는다는 절대적 진리를 외면한 사상들은 인간을 속이는 것이다. 골인점인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가 가장 인생성공의 척도인데도 말이다.

온갖 고생을 다 해도 죽을 때 행복하게 맞이하는 사람은 착하게 진실되게 산사람들이다. 욕심만 가득한 사람들은 절대로 기쁘게 마지막을 맞이하기 어렵다. 천주교의 사제로서 많은 장례를 치러보고 임종을 지켜보았다. 그건 마치 법칙처럼 보인다. 젊어서 고생하더라도 임종 때에 기쁘게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들이다. 고대 기도문을 보면 ‘하느님! 기쁘게 죽음을 맞이하게 하소서!’하는 기도문이 발견된다.

인생을 그렇게 마감하는 것을 생의 소원으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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