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의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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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의 신화
  • 최교성 세례자 요한 <홍주성지 전담 신부>
  • 승인 2022.04.23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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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에는 수많은 상징들이 사용된다. 그리고 상징체계를 갖는다. 예컨데 물은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의미한다. 물은 생명수, 정화, 씻음 등의 심볼을 담고 있다. 인류가 모여서 담합하고 그렇게 생각하자고 결의한 적도 없지만, 모든 인간 안에는 그러한 상징체계를 선험적으로 갖고 있다.

우리 민족도 신에게 기도할 때, 정화수를 놓고 기도를 했다. 기독교는 세례 때, 물을 사용한다. 이렇게 물은 무엇이든지 깨끗이 하고 씻는 정화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또한 물은 생명을 준다. 음식을 못 섭취해도 물만 먹어도 한 달을 버티기도 한다. 이런 상징을 신화에서는 반드시 사용하게 된다.

신화는 비유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신화는 시대를 거스리고 장소를 불문하고 모든 인간을 포괄적으로 아우른다. 모든 신화는 종교를 초월해 인간을 진리로 이끄는 힘이 담겨있다.

구약성서 창세기의 선악과 이야기 역시 창조신화, 창조설화라고 불린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어서 낙원에서 쫓겨난 이야기인데, 이것은 인간의 원죄를 설명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느님이 유일하게 금지한 부분이 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지시였다. 이 선악과 이야기는 결과론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십상이지만 그 과정을 말하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인간의 속성과 본질을 선악과 이야기로 표현한 것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 성서들은 사제들과 예언자들과 인간의 속성을 평생 파헤친 수도승들이 인간의 내면의 진실을 깨치고 신의 영감을 받아 쓴 내용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이야기에는 어찌 보면 인간의 성선설과 선악설을 다 포함하고 있다. 원래 인간은 하느님을 닮은 신의 자식으로서 선하게 만들어져 낙원에서 행복을 거머쥔 상태였다. 그런데 신의 뜻을 거스려 신을 향유하는 기쁨에서 멀어졌다. 그러니 창세기는 성선설, 선악설이 함께 혼재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인간 안에는 선을 행하고 싶은 마음도 있고, 악을 향하는 욕망들도 늘 함께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지만 인간의 욕망은 우리 사람들을 계속 유혹한다.
선악과를 따먹는 것은 인간이 신을 거스려 진리의 길이 아닌 악으로 갈 수 있는 요소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의 뜻이란 진리를 말한다 하겠다. 인간은 진리를 섬기며 살 수도 있고, 내 인생 진리와 상관없이 내 맘대로 살거야! 하는 반항의 기질을 함께 가지며, 이 둘의 싸움을 공존하며 산다. 

성서에 ‘네 앞에 선과 악의 길이 있다. 행복과 멸망의 길이 있다. 너희가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라는 내용이 있는데, 아담과 하와는 선을 거슬러 악을 선택한 것이다. 이런 내용을 설화로써 마치 동화 속의 한편으로 선악과 이야기를 구성한 것이다. 물론 모든 성서는 신의 영감을 통해 쓰여진 책이다. 하느님의 계시로 쓰여진 것이다. 하여튼, 성서이야기에는 수많은 문학작품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선악과 이야기에는 인간은 전적으로 창조된 존재이고 신으로부터, 비롯된 존재이기에 신의 손바닥에서 벗어날 수없는 존재이다. 이것을 족쇄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안전지대를 알려주시는 신의 뜻을 의미하기도 한다. 진리는 분명 진리이다. 진리는 사람을 살리는 길이지 인간을 얽어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망망대해 같은 넓고 넓은 세상에 던져진 외로운 존재이기도 하다. 그 넓은 세상 안에는 수많은 가치관이 혼재해 있고 무엇을 선택할지 우리 인간은 늘 어리둥절하기도 하다. 그런데 이 세상은 이 세상을 창조한 주인만이 가장 잘 알 것이다.
모든 컴퓨터의 프로그램도 그것을 만든 사람만이 풀고 해결할 수 있듯이, 이 세상의 문제 역시 특히 인간구원 행복을 어디에서 구할까? 창조신화는 이 세상을 만든 창조주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 숨어있는 것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도 내일도 우리 인간에게 해방을 주는 말씀이다. 누가 말했던지 진리는 인간을 자유롭게 해준다. 그래서 고전들은 수백 년 수천 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전해지게 돼 있다. 진리는 진리를 원하는 자에게 오게 돼 있다.

우리는 진리를 원하는가? 잘먹고 잘사는 데에 더 관심이 많은가? 자문해야 할 것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점이다. 인간은 진리를 구하고 진리의 삶을 사는 품위가 있는 존재이다. 옳은 일을 행하고자하는 좋은 의지가 모든 인간의 속성이다. 선을 행하면 누구나 기분이 좋다. 자선을 행하면 어려운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자비를 베풀면 마치 자신이 신의 행동에 동참하는 것 같은 걸 느낀다. 바로 인간의 참된 행복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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