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민중과 분단된 조국을 시의 몸으로 온전히 껴안다
상태바
아픈 민중과 분단된 조국을 시의 몸으로 온전히 껴안다
  • 정세훈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3.08.17 08: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선생님 너무 어지러워요./공장 문에만 들어서도/머리가 빙빙 돌아/아무것도 안 보여요/선생님, 칠판 글씨도 안 보여요.//학교 친구들과 선생님이 그리워도/야학을 쉬어야겠다던 내 학생/일당 2700원짜리/철야 야간수당 합쳐도/올겨울 연탄 걱정 때문에/잠 못 이룬다던 내 학생/막내가 국민학교만 졸업하면/함께 벌어/야학에 다니자던 소리에/목이 메어 울던 내 학생//...” 아픈 민중과 분단된 조국을 시의 몸으로 온전히 껴안은 용환신 시인의 첫 시집 <우리, 다시 시작해 가자>에 실린 연작시 ‘가정방문 2’의 일부다. 

시인이 1970년대 유신 시절 대학 생활을 하면서 야학 교사로 소년 소녀공들을 가르친 체험을 시화한 시로써, 1980년대 초 ‘시와 경제’ 동인지에 박노해 시인의 ‘노동의 새벽’과 함께 투고됐던 연작시다. 

당시 관계자들로부터 대단한 호평을 받았지만, 야학에 대한 비판이 진행되던 때라 발표가 미뤄졌다. 시력을 쌓아온 것에 비해 다소 늦은 1992년 11월 출판사 ‘두리’에서 ‘두리시선’ 12번째로 첫 시집 <우리, 다시 시작해 가자>를 출간했다. 그런 연유에서인지 여타의 시집에 비해 뒤표지의 추천사에 시인을 아끼는 다수의 동료 선후배 문인들이 참여했다. 

시인 김형수는 ‘겉으로 부드럽고 속으로 강직하다’라는 제목의 시집 해설에서 “이 시집에서는 정세변화에 따라 시인이 둔갑한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20년 전 그대로 10년 전 그대로의 민중사랑 나라사랑을 노래하는 시. 나는 이렇게 오래도록 변치 않고 자기 삶에 정직한 분들의 시를 그 예술적 성취 여부에 상관없이 크게 흠모한다.”고 밝혔다.

뒤표지 글에서 문병란 시인은 “미란 무엇인가. 시란 무엇인가. 새삼스러운 원초적 물음 앞에서 우리는 진실,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고 논했으며, 소설가 송영은 “우울한 시대를 소박하고 낮게 노래하는 용환신의 시는 바늘 끝처럼 우리에게 지나간 비극의 아픔을 전해준다”라고 전했다. 

홍일선 시인은 “그가 지켜보고 있는 들꽃의 질긴 운명 속에서 시인은 조국의 옳은 길을 능히 예감한다.”고 평했으며, 김정환 시인은 “‘전향하지 않은 성숙한 시 정신’을 이 시집은 보여준다.”고 평했다. 강형철 시인은 “삶만큼 씌여지는 것이 시일진대 환신이 형이 드러내 보여 주는 시의 빛깔을 일러 무엇하랴. 빛나는 삶의 시여, 찬연하다.”고 밝혔다.

“새벽 없는 아침,/그것도 아침인가?/장단 없는 춤,/그것도 춤인가?/그것은 어둠이고, 발광이지.//역사여-/이놈 저놈의 입김에 절여진/역사여-/가슴의 멍 풀리지 않는/동강 난 역사여-/빈 쭉정이 다 태워버리고/동해의 새벽빛 가득 담긴 백두,/중국, 그 너머 땅까지/무너지도록 울리는 북소리로/다시 시작해 가자!/버릴 것 다 버리고./돌아가 다시 시작해 가자!”(시 ‘다시 시작해 가자’ 전문)

시인은 1949년 수원에서 출생했으며, 서울대 농과대학 임학과를 졸업했다. 1987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기관지 ‘민족문학’에 연작시 ‘가정방문’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6월항쟁 뒤 ‘수원민주문화운동연합’ 창립을 주도한 이후 ‘경기남부민족문학협의회’를 결성했다. ‘사람과 땅의 문학’ 편집동인으로 실천적 문학 운동에 매진했으며 민족문학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시집으로 ‘우리 다시 시작해 가자’, ‘겨울꽃’, ‘아직도 노래할 수 없는 서정을 위해’, ‘부론, 그곳에서 읊다’ 등이 있다.

정세훈 <시인, 노동문학관장, 칼럼·독자위원>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