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는 사람 없는 공청회 《발 없는 새》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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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는 사람 없는 공청회 《발 없는 새》를 읽고
  • 장정우 <공익법률센터 농본 활동가>
  • 승인 2024.03.14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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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몽상의 괴로움은 희생자는 보이는데 가해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 있소. 몽상이 실현되려면 가해자가 자신이 가해자임을 고백해야 하는 것이오.”(정찬, 《발 없는 새》, 241쪽)

4월이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10년이 된다. 10주기를 앞두고 이를 기억하려는 노력들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에는 드라마 <D.P>로 알려진 배우 겸 감독 조현철의 <너와 나>가 개봉했고, 다른 극 영화들도 준비 중이라는 소식이 들린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여전히 암울하다. 진실이 밝혀지고 대책을 세우기도 전에 우리 사회에서는 크고 작은 참사가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 오송 지하차도 참사는 사람들에게 잊혀지고 있으며, 이태원 참사 특별법은 대통령의 거부권에 가로막혔다. 오늘도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폭력에 노출돼 있다.
 

발 없는 새/창비/1만 4000원.

지난 2월 21일 오전 11시, 예산군 신암면에서는 조곡그린컴플렉스 산업단지에 관한 공청회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내가 마주한 것은 ‘폐기물매립장 결사반대’라고 적힌 조끼를 입고 단상을 점거한 주민들이었다. 한평생 농사를 짓던 농민이, 한적한 곳에 살기 위해 귀촌한 이들이 단상 위로 올라간 이유는 무엇일까.

신암면 주민들은 어느 날 자신들의 삶의 터전에 쓰레기매립장이 들어선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정확한 상황을 알기 위해 군청과 도청을 찾았지만 군수도, 도지사도 만날 수 없었다. 설명회에서는 형식적이고 일방적인 설명만 있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설명회를 무산시키고, 군수 면담을 요청하고, 도청 앞에서 시위를 하다 보니 공청회에 이른 것이다. 그렇지만 시행사가 개최한 공청회에 시행사의 책임자는 오지 않았다. 아무 결정 권한이 없는 직원 한 명이 나왔을 뿐이었다. 

주민들이 요구한 것은 결정 권한이 있는 사람과의 소통다운 소통이었을 뿐이다. 왜 내 밭에, 왜 내 집 옆에 쓰레기매립장이 들어서야 하는지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듣고 싶었고, 반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그들에게 전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공청회 자리에서 주민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방청인 질의응답’이라는 이름으로 할애된 15분뿐이었다.

신암면 주민들에게서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로 고통받고 있는 이들이 겹쳐 보인다고 하면 이상한가. 정찬 작가의 소설 《발 없는 새》 속 워이커싱 씨는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난징대학살의 피해자이다. 아무런 설명 없이 개인을 압도하는 폭력 속에서도 그는 악을 이해할 수 없으면 그 악을 행하는 이들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되며 이를 방치하는 행위는 그 사람에게 어떤 짓을 해도 허용이 되는 세계로 들어가는 것에 면죄부를 부여하는 행위라는 말을 곱씹으며 자신을 덮친 악을 직시한다.(162쪽) 끈질긴 직시 끝에 워이커싱 씨는 일본군의 반성 없는 태도는 ‘신적 존재’를 향한 숭배에 근거하고 있으며, 신적 존재를 위해서라면 어떤 행위도 용납되며, 신적 존재의 품에 안긴 이들의 눈에는 그 품에 안기지 못한 이들이 벌레처럼 하찮게 보인다는 결론에 다다른다.(242쪽) 그리고 그는 결말에 이르러, 과거 일본군처럼 오늘날 우리를 무심하게 짓밟는 폭력이 숭배하고 있는 ‘신적 존재’가 무엇인지 마침내 밝혀낸다. “그 신의 정체가 무엇이겠소. 자본이오. 놀랍지 않소? 신의 실체가 물질이라는 사실이.”(242쪽)

신암면 주민들은 폐기물매립장을 반대하던 중 지역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산업단지의 이면에 있는 폭력성을 ‘봤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도, 세월호 참사 유가족도 피해자가 돼서야 우리의 생활에 잠재돼 있는 폭력을 봤다. 즉 “희생자가 가해자를 본 것”이다.(240쪽) 이제는 가해자가 희생자를 봐야 한다. 3월 14일, 신암면 주민들은 가해자를 만나기 위해 서울로 간다. 그 자리에서는 우리 모두의 앞에서 가해자가 가해자임을 고백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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