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이 집필한 실존 인물 단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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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이 집필한 실존 인물 단편소설
  • 이상권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4.06.06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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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군 덕산 출신의 박인호는 1883년 동학에 입도해 북접(충청지역)의 지도자로서 동학운동을 주도했고, 동학이 천도교로 개편된 이후인 1908년 천도교 제4대 교주를 역임했으며,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은 분이다.

인공지능 Chat GPT4에 박인호를 주인공으로 하는 단편소설을 써보라고 명령했더니 30초도 채 지나지 않아 아래와 같은 소설을 써냈다. 이 칼럼에 허용된 지면보다는 약간 긴 소설이어서, 분량을 조절했음을 감안해 읽어주시고, 인공지능이 향후 어디까지 발전할 것인지 가늠하며 숙고해 보시기 바란다.

아래 단편소설의 제목은 <하늘의 목소리>이며, 그 내용 대부분이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것이지만, 1940년까지 사셨던 박인호가 해미읍성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마무리한 부분은 픽션이다.


■ 하늘의 목소리
동이 트기 전의 어둠 속에서도 박인호의 마음은 잔잔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예산의 넓은 들판을 바라보며 다짐했다. 부패한 세상을 바로잡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결심이 그의 가슴을 불타오르게 했다.

“형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옆에서 박덕칠이 다가와 물었다. 그의 눈빛은 결연했고, 그의 손에는 마른 풀을 베던 낫이 들려 있었다.

“덕칠아, 우리는 이 땅의 주인이다. 더 이상 고통받지 않기 위해, 우리 힘으로 세상을 바꿔야 한다.”

박인호는 굳게 말하며 덕칠의 어깨를 두드렸다. 사람들은 박인호를 따르며 동학의 이상을 가슴에 새겼다. 

1894년 1월, 전봉준을 중심으로 전라도 고부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은 탐관오리 조병갑을 처단하고, 농민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일어섰다. 박인호는 고부 봉기의 소식을 듣고 예산에서도 봉기를 일으킬 결심을 굳혔다.

“우리도 일어나야 합니다. 고부에서 시작된 이 불꽃을 이어받아야 합니다.” 

박인호는 마을 사람들에게 호소하며, 최시형의 총기포령을 받들어 예산지역의 동학조직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고덕 구만리, 용리, 덕산 북문리, 대흥 갈신 등 동학조직이 활발했던 마을에서 집단 기포를 이끌었다. 

밤이 되자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우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박인호의 외침이 들판에 울려 퍼졌다.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찾기 위해 싸울 것이다. 우리의 가족을 위해, 우리의 미래를 위해!” 그들은 자신들의 힘을 믿었고, 박인호를 믿었다.

박인호는 예포대도소를 설치하고 지휘본부로 삼았다. 그는 각처에서 군량미와 무기를 준비시키고, 농민군의 전투 태세를 갖추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그러나 농민군 출신으로 조직된 이들 사이에서는 규율이 서지 않아 지휘 체계가 무질서했다.

“형님,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요?” 덕칠이 물었다.

“우리는 이길 수 있다. 우리의 힘은 우리의 결의에 있다.” 박인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을 지키기 위해, 우리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싸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결의는 관군의 기습 공격으로 시험받게 됐다. 김병돈이 이끄는 토벌군이 예포대도소를 기습해, 동학농민군은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패퇴하고 말았다.

패배의 아픔을 딛고 박인호는 다시 한번 사람들을 모았다. 흩어진 동학농민군은 서산군 운산면 여미리에 재집결해 보국안민, 척양척왜, 제폭구민, 광제창생의 기치를 새롭게 들었다.

“우리는 다시 일어설 것이다.” 박인호는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우리의 꿈을 위해, 우리의 자유를 위해 우리는 싸워야 한다.”

사람들은 그의 말에 다시 한번 용기를 얻었다. 그들은 박인호의 지도 아래 새로운 결의를 다지며 면천성을 향해 진군했다.

동학농민군은 면천성을 무혈 입성하며 첫 승리를 거뒀다. 그들의 앞길에는 일본군과 관군의 강력한 저항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박인호는 홍주성을 점령해서 농민군의 힘을 더 키우고, 한양으로 진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다. 10월 28일, 3만여 명의 동학농민군이 홍주성을 향해 진군했다.

그들은 높은 성벽과 강력한 일본군의 화력 앞에 많은 희생자를 내며 고군분투했다. 200여 명의 결사대를 조직해 동문 공격을 감행했지만,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무수한 사상자만 발생했다.

12월 5일, 진압군 선봉진이던 이두황 부대가 예산으로 향하자 오가에 주둔하고 있던 동학농민군은 해미읍성으로 후퇴했다. 박인호는 끝까지 싸웠지만, 결국 잡혀 홍주성으로 압송돼 무참히 처형당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남았다.
 

이상권 <변호사, 전 국회의원, 칼럼·독자위원>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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