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등학교 졸업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 주안5공단에 있는 봉제공장이었다. 공장에서 쪽가위로 실밥을 따며, 철야를 끝내고 첫 새벽 공단의 불빛을 보며 썼던 일기 같은 시들이 나의 눈물이고 때론 구호였는데 어디에다 떨궈버린 걸까. 나이 마흔에 놓아버린 끈을 다시 부여잡으려는 욕망이 새삼스레 생긴다. 이 뒤죽박죽 엉킨 삶 속에서 시는 유일한 불빛이다. 내가 그 불빛을 쫓아 날아드는 수많은 불나비 중의 하나이면 어떠랴. 부모님이 계시기에 내 몸이 존재할 수 있듯 인천노동자문학회와 전국노동자문학연대는 나의 몸을 지탱해주는 유일한 창고다. 그 속에서 꿈틀대는 많은 동지들은 얼마나 실한 알곡들인가. 그들과 더불어 또 몇 년 간다. 밀려가도 좋고 끌려가도 좋고.”
2005년 1월 조혜영 시인이 첫 시집 <검지에 핀 꽃>을 출판사 ‘삶이 보이는 창’에서 ‘삶의 시선’ 14번째로 출간했다. 앞의 인용 문장은 시인이 이 시집의 책머리에 밝힌 글 전문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 서울 구로와 영등포, 인천, 부천, 마산·창원, 울산, 서산 등지에 노동자문학회가 결성되었으며, 이를 토대로 전국노동자문학연대(전노문)가 출범했다.
이 나라를 산업화 이후 부강국으로 만들어내는데 견인 역할을 해온 노동자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온전치 못하다. 삶이 올바로 서 있지 못하고 ‘변형’돼 있다. 노동자의 삶은 바로 ‘노동’인데 그 노동이 변형돼 있다. 시집 <검지에 핀 꽃>은 이러한 노동과 노동자의 실상을 감동 깊이 담아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시집에 대해 시인 정세훈은 ‘화장끼 없는 청명한 시’라는 제목의 시집 발문에서 “화장끼 없는 시인의 맨얼굴에 화장품이 필요 없듯, 명징해 잡다한 해설이 필요 없는 작품을 읽으면서 왜 이 세상에 시를 짓는 이들이 반드시 존재해야만 하는가를 자각하게 된다. 또한 시인의 시선은 어떻게 둬야만 올바로 두는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며 “시선을 따뜻하게 베풀되 생색내지 않는 것이 올바른 시인의 자세이며 시의 덕목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고 평했다.
민주노총 조직국장 한선주는 뒤표지 글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인간과 감정…, 이런 것들을 무엇인가를 통해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을 나는 늘 한다. 조혜영의 시에는 그렇게 내가 표현하고 싶은 일상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내가 살아온 서산 땅, 내가 아는 사람들, 내가 아는 조혜영의 삶, 그건 바로 20년이 넘은 우리의 관계이기도 하다. 그래서 혜영이 시를 읽으면 기분이 좋다”고 논했다.
“감자 썰다 검지에서 피 뚝 떨어진다/아리다//한 시절 아리게 산 적 있었지/하얀 광목천에/검지를 갈라 노동해방을 쓰고/한번은 검지를 깊게 베어/원직복직을 외치며 혈서를 썼는데,//지금 그 검지에서/붉은 피 뚝뚝 떨어진다/하염없이 피가 흐르고/도마를 타고 싱크대로 흘러가는데/옹이 박힌 손끝에서 꽃망울 터진다//나는 지금 무어라 쓰고 싶다/한번 꽃처럼 붉게 피어/가슴 깊은 상처를 다시 남기고 싶다”(표제 시 ‘검지에 핀 꽃’ 전문)

학교급식노동자인 시인은 1965년 충남 태안에서 태어났다. 인천노동자문학회에서 활동했으며, 현재 인천작가회의 회원이다. 제9회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시집 <검지에 핀 꽃>, <봄에 덧나다>, <그 길이 불편하다> 등이 있다.
정세훈 <시인, 노동문학관장, 칼럼·독자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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