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의사의 일손이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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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의사의 일손이 부족하다
  • 김희준 <정책전문가, 자유기고가>
  • 승인 2024.09.05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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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의’ 제도를 제안함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이 있다. 이는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가 의술을 배우고 익히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의미로 쓴 것이며, 그러기에 인간의 수명이란 너무 짧다는 뜻으로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가 인용했다. 한 사람의 의사가 탄생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세월과 정력과 비용이 필요한가. 전문의를 예로 들면 의과대학 6년 또는 일반대학 4년에 의학전문대학원 4년 도합 8년에 수련의(인턴) 1년, 전공의(레지던트) 4년, 군의관 3년 하면 15년 내외의 세월이 필요하다. 한 사람의 의사가 자기의 인생을 걸고 인애의 사업을 시작하는 것은 이렇게 여름의 천둥우뢰와 가을의 된서리를 여러 차례 견뎌낸 다음인 것이다.

내년부터 의과대학 정원 2000명 증원을 놓고 의사들과 정부가 평행선을 달려왔고 앞으로 얼마나 더 시달릴지 알 수 없으며, 그 사이에 국민은 무척이나 불안해하고 무엇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게 죽어가고 있다.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위한다는 보건의료정책이 국민을 생사의 궁지에 몰아넣는 역설적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도대체 문제의 본질은 무엇일까. 정부나 의사들이나 자기들의 폐쇄적 논리의 미궁에 빠지지나 않았는지, 문제의 본질을 다시 파악하고 어떻게 하는 것이 국민을 위한 개혁인가 재고해 봐야 한다. 문제의 본질은 의사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의사의 일손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공계의 자격제도를 살펴보면 기술사, 기사, 산업기사, 기능사의 4원 체제를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기능계에서는 기술사 대신에 기능장이란 자격이 있다. 기술사만이 할 수 있는 범주의 일이 있지만, 기사도 전문분야에서 상당한 범주의 일을 할 수 있으며, 산업기사와 기능사도 각기의 직분이 있어서 전체적인 생태계 속에서 일을 잘 수행해 가고 있다. 이를테면 건축 분야만 하더라도 부실시공 시 많은 인명피해를 야기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는 일이지만 각 수준의 자격에 따라 자기 일을 무난하게 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의료계의 일반적 면허 또는 자격제도를 보면 의사(한의사 포함), 간호사, 간호조무사의 3원 체제로 돼 있고, 법적으로 의사가 아닌 사람이 질병을 치료하는 것은 불법이다. 의료법 체계상 질병 치료에 있어서 의사의 역할이 가장 중심적인 역할로 돼 있고, 간호사와 간호조무사는 의사를 도와 각기의 고유한 영역에서 일을 수행하게 돼 있다. 의사의 업무는 질병의 진단, 처방, 치료로 나눠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중에서도 의사가 다년간 쌓은 고도의 지식과 판단이 필요한 부분이 진단과 처방이기 때문에 의사의 본질적인 영역이라고 하겠다. 치료는 진단과 처방에 따라 수행하는 기능적인 부분이 포함됐다고 볼 수 있으며, 의사가 실질적으로 간호사와 간호조무사의 도움을 받아 시행해왔다. 최근 PA간호사 제도의 도입으로 간호사의 일정한 치료행위에 대한 법적 근거가 부여됐다.

그런데, 의사의 치료행위에 필요한 일손을 실질적으로 보강해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의료체계의 한 축을 담당하는 간호사의 자기발전 욕구를 충족해주며, 격오지의 의료접근성을 현실적으로 개선하고,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청소년과, 흉부외과, 비뇨의학과 등 필수의료를 보강(의료수가 상향 조정 병행)하는 방법으로서 ‘치료의’ 제도를 제안하는 바이다. ‘치료의’는 간호사로서 해당 과목에서 소정 년수의 경험을 쌓은 사람이 당해 분야 의사의 추천을 받아 의과대학에 지원하고, 의과대학에서 다른 제반 자질과 능력을 감안한 전형으로 선발해 2년의 교육을 필한 자로 한다. 간호사로서 쌓은 지식과 경험에 더해 전문 과목에 특화된 실무 위주의 교육을 통해 특정 과목에서는 발군의 실력을 쌓은 ‘치료의’는 의사만이 할 수 있는 진단과 처방에 따라 의사의 위임과 지도하에 일정한 치료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의사 개인이 손수 해야 하는 업무의 상당 부분을 ‘치료의’에게 맡길 수 있고, 의사만이 할 수 있는 진단과 처방, 발전적인 치료, 의학 연구에 집중할 수가 있다. 격오지에서는 ‘치료의’가 의사와의 계약이나 위임을 통해 개업, 환자와 밀착해 의료서비스를 할 수 있다. ‘치료의’ 교육과정에는 응급치료의 과목도 필수로 이수해 격오지 환자의 위급 시 필요한 처치를 하고 필요 시 본 병원으로 이송하게 된다. ‘치료의’는 의료의 사각지대인 격오지에서 활동하면서 그곳에 사는 환자의 불편을 경감시키고 위급 시 구명을 보장할 수 있다.

국가와 사회는 전체적으로 일종의 유기체로 기능하는데, 어느 한 부문만에 자원과 노력을 집중한다면, 전체적 조화와 균형이 깨질 수밖에 없다. 현재 우수학생들이 의과대학에 집중지원 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는 상태에서 의과대학 정원을 갑자기 2000명이나 늘리게 되면, 다른 이공계 전공에 대한 우수학생 지원의 감소를 가져올 것이 뻔하다. 인공지능(AI), 양자과학, 생명과학, 원자력, 우주, 해양, 국방과학 등 우수한 이공계 인재가 진출해서 연구해야 할 분야와 일들이 너무나 많다. 한국이 아주 작은 국가로서 의료부문에 특화해 국민총생산(GNP)의 수십 퍼센트를 올리는 전략이라면 의료부문에 이공계의 우수학생 태반을 집중해 육성하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초과학, 전략산업 등 여러 가지 부문의 고급 인재를 양성해 국민소득을 늘리고, 그 소득으로 국민 건강과 선진 의료체계를 보장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대체로 한국의 의료수준과 서비스는 선진국 수준으로 국민의 의료서비스 만족도는 높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부가 지적하다시피 필수 의료과목의 소외, 격오지 의료서비스의 접근성 열악 또한 사실이다. 정부는 문제의 본질을 재고하고, 상기 ‘치료의’ 제도 도입을 상정해, 의과대학 정원을 무리하게 늘리는 것을 백지화하고, 의사협회와 간호사협회도 ‘치료의’ 제도를 긍정적으로 검토, 의사의 고유영역과 치료행위에 있어서 지도적 지위를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간호사와 간호조무사에게 자기발전의 기회를 제도적으로 제공하고, 국민은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실질적으로 가까이에서 누릴 수 있는 ‘한국식 선진 의료체계’를 정립할 것을 촉구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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