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천제일장학회 이사장
칼럼·독자위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해(프랑스 조계)에서 역사적인 닻을 올렸다. 3·1운동이 결정적인 기폭제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3·1운동 전부터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입각해 연해주에서 조직한 대한국민회의(문창범 계열과 이동휘 계열 중 이동휘 계열만 참여)와 국내 애국지사들이 조직한 한성정부, 안창호 선생 등 상해 임시정부를 주도한 분들이 한성정부의 내각 명단을 수용하고 대통령에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재무총장 최재형 등으로 내각을 꾸리고(좌우 합작적 성격) 통합 임시정부가 출범하게 됐는데 국호를 대한민국(이전의 대한제국은 군주제이고 대한민국은 공화제 즉 민주국가)으로 정했다.
비록 망명정부이지만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처음 태동한 것이다. 반만년 역사상 부끄럽게도 나라 이름이 없었다가(1910년 8윌 29일~1919년 4윌 10일) 이제야 나라 이름을 갖게 됐으니 그 감격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현행헌법 1조와 같음)를 비롯해 제2조(대의제), 3조(평등권), 4조(자유권), 5조(참정권), 6조(교육 납세 병역 등 국민의 의무), 사형제, 고문, 공창제 폐지 등 민주국가가 갖춰야 할 최소한의 요건을 갖춘 헌법이 제정됐다. 또한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 전체에 있다는 ‘주권선언’도 했다. 다만 광복운동 중에는 독립운동자(광복운동자)가 이를 대리한다고 명시했다. 여기서 광복운동자라 함은 조국광복을 직업 삼아 활동하거나 직간접적으로 정력, 물력(자금조달)으로 공헌한 자로 규정했다. 1948년 제헌헌법의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현행), 2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등 현행헌법의 대부분이 임시정부의 헌법 골격을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임시정부의 역사(1919년~1945년)는 제1기 상해시대(1919~1932), 제2기 유랑시대(1932~1940), 제3기 중경시대(1940~1945) 등 총 3기로 구분된다. 상해시대에는 외교활동의 일환으로 국제연맹에 제출하기 위해 ‘한일관계사료집’을 발간하고 1921년 말에 열린 워싱턴회의 극동인민대표회의에 한국독립문제를 상정하기 위한 노력을 했고, 1922년초 모스크바에서 열린 피압박민족 문제를 다룬 회의에 김규식, 여운형 등 52명의 대표단을 파견하고 임시정부 홍보 기관지 ‘독립’을 창간했다. 이 기관지는 1919년 10월 ‘독립신문’으로 제호가 바뀌면서 1926년까지 발간했다.
이후 임시정부 요인들의 내분으로 고초를 겪기도 했으나 1931년 만주사변에 이은 만주국수립(일본의 술책)에 자극받아 김구 선생이 의열단 투쟁을 하기 위해 청년들을 기반으로 ‘한인애국단’을 조직해 1932년 1월 이봉창 의사의 일왕폭탄투척사건(동경), 4월 윤봉길 의사의 폭탄투척사건(상해)의 쾌거가 일어나자 중국 국민당 정부는 중국군 30만 명이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청년이 해냈다고 극찬함으로써 임시정부의 존재와 활동이 세계만방에 알려지게 됐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윤 의사의 쾌거로 인해 임시정부는 악에 받친 일본군의 집요한 추격으로 정처 없는 유랑길에 접어들었다.(유랑시대) 8년간 임시정부 간판을 짊어지고 항주, 가흥, 진강, 장사, 광주, 유주, 기강 등을 전전하다 보니 제대로 독립운동을 할 수도 없었다. 이렇게 떠돌다가 1940년 중경에 정착했다.(중경시대)
임시정부 요인들은 ‘더 이상은 도망가지 않겠다, 차라리 중경에서 자폭하고 말자’라는 결연한 의지로 버텼다. 중경에 정착하면서 광복군을 창설했다. 국권침탈 후 국내와 만주지역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고 봉오동 대첩과 역사적인 청산리 대첩의 쾌거를 이뤘고, 제2의 청산리대첩이라는 대전자령 대첩(1934년) 이후 만주지역에는 무장투쟁이 소강상태를 유지하며 소규모적 산발적으로 독립운동이 계속됐지만 그 성과가 미미한 상태였다. 그래서 중경에 정착한 다음달 9월에 국내, 만주와 중국지역에 산재한 소규모 독립군 부대를 총 망라해 마지막 독립군격인 광복군을 창설하고 대일선전포고를 하는 등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그런데 이 광복군 창설 당시 부부 광복군 두 쌍이 있어서 화제가 됐다. 안춘생·조순옥 부부와 박영준·신순호 부부가 그들이다. 안춘생 선생은 안중근 의사의 조카로 태평양전쟁에도 참전했고 해방 후 육군에 입대, 1961년 중장으로 예편한 후 국회의원과 독립기관장을 역임하고(건국훈장 독립장) 100세에 타계하셨다. 부인 조순옥 여사는 광복군 2지대 분대원으로 활약했으나 1973년 50세로 일찍 타계하셨다(건국훈장 애국장).
박영준 선생 역시 광복군 활동에 혼신을 다했으며 해방 후 군에 입대, 소장으로 예편했다(건국훈장 독립장). 군복무 중에 현역군인들의 지침서인 ‘정훈교육서’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2000년 타계 건국훈장 독립장). 부인 신순호 여사도 광복군 활동의 공적으로 애국장을 받으셨다. 여성광복군이 위의 두 분만 있었던 건 아니고 오광심, 김정숙, 이복영 여사 등 30여 명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지난달 79주년 광복절 기념행사가 파행적으로 거행돼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 일이 있었다. 이종찬 광복회장이 건국절 제정문제를 빌미로 정부 주도 행사에 불참하고 따로 기념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표면적인 이유는 건국절 문제이지만 내면적으로는 본인이 추천한 인사가 독립기념관장에 선임되지 못한 데 대한 불만의 표출로 알려지고 있다. 공정한 심사를 통해 독립기념관장이 선임됐는데도 불구하고 몽니를 부린 것이다. 설사 정부 처사에 불만이 있더라도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다.
광복절 기념행사는 광복회 전유물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정부방침에 따르는 것이 상식이고 순리다. 몇 년 전에 김원웅 광복회장이 명분 없는 상을 만들어 좌파인사들에게 남발하고 광복회 운영을 멋대로 자행해 물의를 일으키더니 이종찬 광복회장도 한몫거든 셈이다.
건국절을 임시정부수립일인 4월 11일로 하느냐 정식 정부수립일인 8월 15일로 하느냐 하는 문제는 사학자들의 치열한 논쟁과 공청회를 거쳐 반드시 국민 의견을 수렴해 결정하면 되는 일이지 누구 한 사람이 주장해서 될 일이 아니다. 이종찬 회장의 맹성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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