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취재기자
기자는 숲의 매혹에 매번 기분 좋게 지고 마는 그런 사람, 산책자이다. 2022년 여름, 평소와 비슷한 경로로 산책을 이어가다 한 그루의 나무에 시선이 닿았다. 거의 매일 걷다시피 했던 길에서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 나무, 그 나무는 모든 줄기가 댕강 잘려 나가 있었다.
걸음을 멈추고 아니, 마치 뿌리를 내리고 한 자리에 박힌 나무처럼 수 분간 잘린 나무만을 응시했다. 심연을 들여다보는 철학자라도 된 듯, 진지하고 심각한 표정을 하고선 천천히 눈동자를 옮겨가며 나무의 잘려 나간 단면과 있는 둥 마는 둥 한 몽땅한 가지와 와중에도 풍성히 달린 초록 잎사귀와 나무의 껍질 그리고 그 거친 굴곡을 거니는 개미 떼의 행렬까지, 나무의 전부를 낱낱이 더듬었다. 그것들의 감촉이 전해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잘린 나무가 녹음이 될 수 있었던 건 햇볕이 빗물이 바람이 ‘공평하게’ 닿았기 때문이다. 미추(美醜)의 기준에서 졌다고, 결함이 있다고, 장애가 있다고 차별받는 건 인간 세계에나 있는 일이다. 자연계는 모든 것이 섭리에 맞게 돌아간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된 도리로서 섭리를 깨닫고 읽어낼 줄 알아야 한다. 기자는 이런 마음으로 ‘예산꿈빛학교’를 찾았고, 세 번의 연재 동안 공통으로 쓰일 제목을 ‘작은 씨앗이 푸르른 잎사귀를 펼쳐낼 수 있도록 햇볕, 빗물, 바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닿는다’로 정했다.
예산꿈빛학교 첫 방문일은 지난해 11월 29일로, 기자는 당시 고작 수습 1개월 차 신입이었다. 전화로 미리 약속하지도, 뚜렷한 취재 계획도 없이 단지 어떤 마음만을 품은 채 학교 안으로, 성큼 교장실 문을 두들겼다. 그럼에도 김성희 학교장이 기자에게 준 것은 ‘환대’ 그 자체였다. 김성희 학교장과 취재에 여러모로 도움을 준 김소영 교사가 있어 취재의 방향성이 잡혔고 구체적인 계획이 가능했다. 기자 수첩을 빌려 감사를 전하는 게 아니다. 정말이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다.
세 번의 연재 중 1~2회에 연달아 등장한 특수 학생 대성이는 기자와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 날이 궂을 때면 대성이와 할머니가 실랑이하는 소리가 기자의 집까지 들린다. 주로 “치킨 사주세요, 놀러 가요” 등 무언가를 요구하는 대성이의 외침과 이를 타이르는 할머니의 목소리다. 때문에 대성이의 이야기를, 예산에 특수 학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비록 기자라는 옷을 빌려 대성이와 대성이 할머니, 예산꿈빛학교에 다가갔지만 기자가 되기 훨씬 이전부터 마음은 그쪽을 향해 있었다.
그쪽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인간은 더러 모르면서도 그냥 끌리게 되니까. 동네를 오가다 대성이를 여러 번 마주했고 노란색 버스가 대성이의 집 앞에 정차돼 있는 것도 여러 번 보며 마음이 동요되는 것을 느꼈다. 그 동요가 어떤 성질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정확한 건 단순한 연민과 동정은 아니었다. 기자는 연민과 동정은 자신의 결핍으로부터 파생될 수도 때론 상대를 얕잡아 보는 오만일 수도 있다는 관념을 갖고 있으므로.
취재를 위해 예산꿈빛학교에 대략 세 차례가량 방문했고 1층부터 4층까지 그리고 지역민과의 상생 공간인 꿈빛 카페 1호점이 있는 건물까지 자세히 안내받아 둘러볼 수 있었다. 타학교와의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었고 연신 감탄이 나왔다. 또한 교장 선생님과 특수 교사들이 모든 학생들의 이름을 외우고 있다는 점과 학생들이 선생님을 얼마나 편하게 느끼고 다가오는지를 보며 학교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기운 같은 것에서 특정 계절이 연상됐다. 겨울의 침묵을 모조리 밀어내고 서로 높이를 겨루며 자라나는 봄꽃들과 바람에 떠밀려 다니는 나비의 표표한 움직임, 기자의 머릿속에선 언뜻 그런 풍경이 재생되고 있었다.
학교 내부 전체를 안내받고 설명 들었기에 이를 모두 전달하고 싶은 욕심이 생겨났다. 그렇지만 역시나 모든 것을 담기엔 무리가 있었고 이에 따르는 아쉬움 또한 여전히 남아있다. 특수 학생들이 생산한 도마·커피·블랜딩 티 모두 이미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는 제품이기 때문에 당연한 소리일 수 있겠지만, 전 제품의 상품 가치가 예상보다 훨씬 높아 놀라웠다. 그리고 기자는 순간 느낀 이런 감정을 알아채며 스스로에게 몰래 실망하기도 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마음이 이끄는 대로, 좋은 취지를 품고 학교에 찾아간 건 맞으나 기자 역시 장애 학생들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다는 사실을, 여기에서 깨달았다. 스스로의 못남을 인정하고 고백한다. 특수 학생들은 장애가 있기에 우리에게 도움만 받는, 우리가 도와줘야만 하는 그런 존재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기존의 생각이 한참 어설프고 잘못됐다는 것을, 눈과 혀로 느꼈다. 세 번의 연재 동안 다룬 다양한 활동 모습과 취업 현황이 이를 증명한다.
우리 또한 잘린 나무고, 저들 또한 잘린 나무다. 우리는 모두 부분적으로 잘려있다. 인간 또는 무엇에게 받은 상처로, 인생에 찾아온 고난으로, 당연히 있어야 할 것들의 부재로. 어쩌면 ‘살아간다’는 건 부분적으로 잘릴 수밖에 없음을 전제한, 목숨 달린 것들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기자는 감정을 배제해야 한다. 감정 섞인 텍스트는 지적받아 마땅하다. 예산꿈빛학교를 취재하며 이 점이 제일 어려워 마음이 자주 곤해지곤 했다. 더 애틋하게 쓰고 싶었고, 그렇게 써졌던 글자를 여러 번 지우고 고쳐냈다. 예산꿈빛학교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며 결코 끝이 아니라 마음먹고 있다. 하나의 선입견이 부서짐으로써 사고의 확장과 수렴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기자는 봄을 기다린다. 예산꿈빛학교에서 느꼈던 계절이 머지않아 눈 앞에 펼쳐지면 대성이와 산책할 요량이다. 초록 잎사귀가 춤을 추는, 잘린 나무가 있는 숲으로 나란히 걸어가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봄과 여름은 나무의 속살에 춘재를, 가을과 겨울은 추재를 만들어 낸다. 나무는 이 두 겹을 번갈아 두르며 성장한다. 우리는 비극과 희극을 겹겹이 두른 잘린 나무다. 누가 조금 더 잘렸다고 그래서 누가 더 못났다고, 부질없는 판가름을 하지 않을 때 우리의 숲은 더욱 푸르러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