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성녹색당
칼럼·독자위원
지난 3월 8일은 116번째 ‘세계 여성의 날’이었다. 여성의 날은 1908년 미국 뉴욕에서 1만 5천여 명의 여성 섬유 노동자들이 선거권 및 노동 여건 개선 등을 요구하며 대대적인 시위를 벌인 것에서 시작됐다. 이후 유엔에서 이를 공식 기념일로 지정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2018년도부터 법정 기념일로 지정해왔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여성 인권이 이제는 많이 향상됐으니 여성만을 위한 기념일이 꼭 필요하냐고 묻는다. 홍성읍 거리에서 여성의 날을 알리는 피켓을 들고 시민들을 향해 인사를 건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남성의 날은요?”
그 순간엔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물론 바삐 발걸음을 옮기며 스쳐 지나가는 상황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리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왜 이런 기본적인 질문을 아직도 들어야 하는가, 왜 ‘여성의 날’이어야 하는지 설명해 줘야 하는 건 여성들 몫인가, 그리고 이런 설명을 친절하고도 끈기있게 정성껏 설명해 줘야 했는가 등등. 그다음에 든 생각은 우리를 지켜줄 ‘말’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지난 5일 발표한 ‘유리천장 지수’에 따르면 한국은 OECD회원 29개국 중 28위를 기록했다. 남녀 평균 임금 격차도 29.3%로 가장 컸다. 일하는 여성 근로자가 겪는 차별뿐일까. 지난 한 해 ‘친밀한 남성 파트너’에 살해된 여성의 숫자는 181명이다. 살인 미수나 기타 피해 사례까지 합치면 650명이라고 한다. 또한 ‘일면식 없는 남성’에 의한 살인 혹은 미수 피해도 179명에 달한다. 일상에 스며있는 여성혐오가 극단적 현상으로 표출된 것이 바로 여성에 대한 폭력 및 살해다. 우리나라에서 6년째 여성의 날을 기념하고 있지만 아직 성차별 없는 사회는 요원해 보이는 이유다.

이렇게 명백히 존재하는 차별에 더해, 여성들의 사회정치적 위치에 대해 무지한 이러한 질문들(혹은 공격)까지 받는 것이 여성의 현실이다. ‘이 정도면 많이 나아졌다’, ‘나는 잘 모르겠는데 너무 예민한 거 아니냐’, ‘왜 여성의 날, 여가부만 있는 거냐’는 말을 듣는 여성들에게,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의 저자 이민경은 상처받지 않고 대응할 수 있는 매뉴얼로써 이 책을 펴냈다. 그의 목적은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남성들을 설득시키고 만족스러운 답을 줄 수 있는지가 아니다.
정성스러운 대화를 마치고도 상처를 입은 수많은 경험을 통해 ‘최대한 인내하며 친절히 설명하기’보다는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말하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저자는 과연 이해는 누구의 몫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는 차별이 존재하는지 아닌지, 무엇이 차별인지는 차별을 당하고 있는 사람만이 알고, 결정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또한 여성의 목소리를 남성이 들어보자고 결정했다 해도 여성은 그 결정에 감동하며 고마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보통 ‘좋은 게 좋은 거지, 왜 그리 정색해? 그러니까 안 되는 거야’라는 말들과 함께 여성은 더 친절하고 온화하게 참고 설명하지 않는다고 비난받지만, 여성의 목소리는 ‘온전한 주체가 되고자 하는 몸부림일 뿐 남성에게 인정을 받고자 함이 아니’며 화합으로 나아가고 싶다면 ‘오랫동안 귀를 닫고 있었던 이들이 먼저 들어보자고 결정하는 것 이상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이다.
남성의 날은 왜 없냐는 듯 질문을 던지고 지나간 사람은, 그러고 보니 저자의 말대로 정말 이 사안에 대해 알고 싶어서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진정 궁금했다면 멈춰서서 우리의 활동을 존중하며 정중히 대화를 요청했을 것이니 말이다.(사람 사이에서 궁금한 것이 있을 때는 누구든 그렇게 하는 법이지 않은가) 물론 이 책에 실린 말들은 많은 남성들의 공감을 얻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여성들에게 대화를 아예 시작하지 않는 방법도 있다고 가르쳐주니 말이다.
여성들에게 필요한 건 완벽한 대답을 알려주는 매뉴얼이 아니다. 우리는 차별을 겪을 수밖에 없게 태어났기에,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존재들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차별과 여성혐오를 내재화하지 않고, 그러니까 자기검열과 자책, 혹은 인내와 헌신하지 않으며 충분히 존중과 배려가 확보된 상태에서만 대화에 응하는 단호함과 내 존재에 대한 확신과 사랑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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