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풀무학교 생태농업전공부
칼럼·독자위원
왜 이 사람은 이다지도 전투적일까? 소위 시인이란 사람이 원색적인 욕설들을 써가며 누구를 그렇게 증오했을까? 이런 것도 시가 될 수 있나 싶게, 일견 촌스럽기도 하고 직선적인 그의 시. 이렇게 목숨 걸고 ‘싸우는 사람’의 내면엔 대체 무엇이 있을까? 어쩌면 그럴 수 있었을까? 이게 시인 김남주에 대한 나의 의문이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태어난 김남주. 그의 아비는 머슴이었다. 일본군에 밀려 도망치다 전사한 동학농민군의 후손일 것으로 추정되는 그는 1914년경 해남군 삼산면의 한 부잣집에 어느 날 흘러들어왔다 한다. 전라도라 곡창지대. 그것은 그만큼의 수탈과 저항을 의미하며, 저항의 불길이 사그라들면 이름 없는 그들이, 그 가족들이 정체를 숨겨야 했음을 의미한다. ‘땅끝’ 해남엔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10여 년의 머슴생활 끝에 부지런함을 높이 산 주인댁이 한쪽 눈이 불구였던 딸을 맡기면서 결혼을 하게 됐다.
아내에게 늘상 기죽어 살 수밖에 없었다. 특히 외갓집 어른들이 오면 더욱 그랬다. 그들은 주인이었고 자기는 종이었으니까. 터무니없이 넓은 마당, 농사꾼 같지 않은 허여멀건한 낯짝, 차려입은 양복이 김남주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 어린 시절의 그는 그 감정의 정체를 분명히 인식하지는 못했겠지만, 그것은 ‘계급 감정’이었다.

김형수 저/ 다산책방/ 2022년 12월/ 22,000원
김남주는 공부를 잘했다. 예나 지금이나 시골에서 농사짓는 어른들이 자식에게 거는 기대는 양복 입고 펜대 굴리는 검·판사가 같은 것이 되어 편하게 사는 것이다. 하물며 머슴 출신인 아비의 입장에서는 오죽했을까. 쎄가 빠지게 일해도 가난하고 무시당하는 운명을 누가 물려주고 싶을까. 당시 명문이었던 광주일고에까지 합격했으니 그에게도 당연히 이런 기대가 따라붙었다.
그러나 출세를 위해 공부하는 게 도저히 체질에 맞지 않았고, 인간적으로도 못 해먹을 짓이라 여겼던 그는 고등학교를 돌연 자퇴한다. 우여곡절 끝에 검정고시를 거쳐 전남대 영문과에 입학했고, 집안에서는 다시 난리가 났다. 우리 집안에도, 우리 마을에도 대접받을 사람이 하나 나오는구나. 대학생 신분으로 해남 집으로 돌아가던 길, 마을에서 마주치는 어른들이 그에게 공손히 인사하며 하오체를 썼다.
그때 김남주가 느낀 것은 강한 위기감이었다. ‘아, 나는 외갓집 사람이 아닌데. 내가 머무를 세계는 내 아비와 같은 이들이 사는 곳인데.’ 그의 시에 투박한 사투리와 욕설이 난무하는 것은 이런 마음이 반영된 정치적 태도이다. 잘난 놈을 더 잘나게 하고 못난 놈을 더 못나게 하는 부조리한 구조 앞에서 나는 반항하겠다. 못난 놈 편에 서겠다.
<종과 주인> // 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고 / 주인이 종을 깔보자 / 종이 주인의 목을 베어버리더라 / 바로 그 낫으로
그러니까 이 시는 종이었던 자신의 아비와 그 아비와 같은 수많은 사람과 한 몸이 되지 않고는 쓸 수 없다. 시에서 투쟁적이었던 것과 달리 일상생활에서 그는 ‘물봉’ 소리를 들을 정도로 싱거운 면이 있었다고 하는데, 평전의 저자 김형수는 이를 ‘자기 이웃들 앞에서 자발적 무능을 택하는 버릇’이라 표현한다. 제 잘남을 자랑하지 않고 만인의 평등을 바랐던 이 마음.
강자가 약자를, 중앙이 주변을, 지주가 농민을, 자본이 노동을, 제국이 식민지를 짓누르는 것에는 별 이유가 없다. 그저 동급의 인간이 아니기 때문. 지배자의 일은 지배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억압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는 가차 없는 대응이 필요하다. 존재 자체가 깔보아질 때 피 흘려 싸우지 않는 것은 노예이다. 그게 김남주의 생각이었고 유신 말기의 엄혹하던 시절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에서 행동대의 전사로서 활동하며 실천으로 옮겼다. 한 재벌 회장의 집을 털다가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당하고 9년 3개월을 복역했다.
한(恨)이란 감정은 구조적으로 만들어진다. 과거의 맥락을 잘라버리고 짐짓 애달프게 한 자체를 노래하는 서정을 김남주는 참을 수 없었다. 시를 말하기 위해서는 만인의 자유가 있어야 했고 그래서 시인이고자 한다면 마땅히 전사여야 했다.
이런 윤리적 고결성, 철저함을 모두가 따라하긴 어렵다. 폭력 노선에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차악이 아니라 최선을 향해 단숨에 달려나갔던 모습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이런 삶도 가능하구나. 이런 인생도 있을 수 있구나.
누구보다 현실에서의 승리를 바랐던 그는 역설적이게도 죽어도 죽지 않는 불멸의 상징으로 남았다. 끊임없이 싸우는 전사의 모습으로. 이런 그의 삶을 한 위대한 척도로서 마음에 지고 다닐 수 있지 않을까. 냉소와 무력과 분열과 자학을 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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