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은 자’ 항일운동과 교육계몽에 힘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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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은 자’ 항일운동과 교육계몽에 힘쓰다
  • 이정은 기자
  • 승인 2025.04.18 08:09
  • 호수 886호 (2025년 04월 17일)
  • 8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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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승태 선생의 삶과 가르침
광천문예회관에서 청중들이 특강에 집중하고 있다.

[홍주일보 홍성=이정은 기자] 1854년 홍성 광천에서 태어나 3·1운동에 지도·참여하는 실천가이자 근대교육 확산에 힘 썼던 인물, 일농(逸農) 서승태 선생에 관한 특별강연이 지난 2일 광천문예회관에서 열렸다.<사진>

‘일농 서승태 선생 기념사업회 설립 추진위원회’가 주최한 이번 특강은 (사)선인역사문화원의 김형목 연구소장이 맡았으며, 서승태 선생의 후손 5명이 자리했다. 

강연장을 찾은 일농 서승태 선생의 후손들(5명)이 좌석 앞줄에 앉아 있다.

이용록 홍성군수와 신동규·이선균 홍성군의회 의원, 임광섭 홍성교육지원청교육장, 배상목 홍성문화원장, 정동규 광천읍장, 김노성 광천읍주민자치회장, 편기범 너른내장학회 이사장, 최건한 홍주문화관광재단 대표이사, 주호창 광천노인대학장 등 여러 내빈이 참석해 특강을 함께했다.

이용록 군수는 격려사를 통해 “서승태 선생은 우리 지역뿐만 아니라 국가를 회복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신 분”이라며 “우리 지역의 역사적 인물을 재조명하고 앞으로도 힘과 의지를 모아 많은 인물이 알려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 선생은 1919년 3월 18일, 당시 예순 다섯의 나이에 광천독립만세운동에 전교생을 이끌고 시위 행진하며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 일본 순사에게 주동자로 지목돼 체포됐다. 이후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던 중 가석방돼 집으로 돌아왔으나 7일만에 세상을 하직했다.

서승태 선생은 광천 3·1운동 지도뿐만 아니라 개신유학자로서 근대교육을 보급하는 일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선생은 1908년 고향 광천에 사립 덕명학교(德明學校)를 설립해 신문화를 교육하며 후학 양성에 전력을 다했다. 이는 민중 계몽에 의한 문명사회 건설과 항일의식을 일깨우려는 구국교육운동의 일환이었다. 

현재는 아쉽게도 학생 감소로 인해 폐교(2019.3.1.)된 상태이나 (현)덕명초 운동장에는 ‘일농 서승태 선생 흥학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기념비에는 “자신의 토지와 전답을 내놓고 재원을 확보해 학교를 설립하는 데 쓰셨다. 오직 학교를 유지하는 데 힘을 기울여 재산을 모두 썼으니, 만년에는 죽으로 끼니를 잇기도 힘들었으나 후회하지 않고 정성과 힘을 다해 8년동안 영재를 교육해 6회에 걸쳐 졸업생을 바출했다”고 쓰여있다. 
 

김형목 (사)선인역사문화원 연구소장이 특강을 이어가고 있다.

이날 특강을 맡은 김형목 (사)선인역사문화원 연구소장은 “일농 서승태 선생과 같은 역사 인물의 삶을 ‘우리 시대엔 안 맞는 얘기’라고 치부할 게 아니라 ‘시대가 요구하는 자기 역할’이라는 게 있다”며 “개인보다는 공공을 위해 살았던 그들의 삶을 들여다 봄으로써 그때와는 상반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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