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성녹색당
칼럼·독자위원
일을 그만뒀다. 정해진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고 지루함을 견디고 그 대가로 소득을 얻는 쳇바퀴 같은 일상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물론 당장에 소득이 없다는 부작용이 따라온다. 하지만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소비가 줄어들기도 했다. 매일 파김치가 돼 오면 집안일할 기력이 없어 외식의 유혹에 빠진다. 밥을 사 먹기 위해 내 하루를 바치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조금 더 나를 돌보고 자율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일과를 연구해 보고 싶었다.
과감한 결단과 달리 일을 하지 않으니 경제적 불안감은 당연하고, 제구실 못 하는 사람,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나의 고민은 과연 일이라는 게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됐다. (여기서 일은 유급 노동에 고용된 상태의 일이다)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일을 함으로써 그 가치, 지위를 인정받고 자신의 주요 정체성으로 삼는다.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가는 통로이며, 소득을 통해 의식주 등 필요를 채운다. 자기표현의 수단이 될 수 있는 노동은 창작, 몰입의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일의 폐해가 없는 것은 아니다. 반복되는 힘겨운 노동을 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많다. 이때 노동은 견뎌야 하는 것이 된다. 마르크스의 소외 개념을 가져오지 않아도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자기 계발에 쓸 시간, 기력을 소진하고 정치, 사색, 즐거움에 쓸 시간 또한 없어진다. 우리는 ‘어엿한 (직업을 가진) 성인’이 되기 위해, 자라는 동안에는 직업을 갖기 위한 준비에 대부분의 시간을 바친다. 네트워크 기술의 발전으로 퇴근 시간 이후 조금의 여가 시간도 침범당하기 일쑤다. 더 나은 직업(소득)을 갖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으로 쓰기도 한다. 정확히 언제 우리는 진정한 삶의 시간을 살 수 있는 걸까?

‘일하지 않을 권리’에서는 공정한 임금이나 더 나은 노동 조건이라는 요구를 넘어서, 일 바깥에서 더욱 풍족하게 살아갈 권리에 대해 고민하고자 질문을 던진다. 우리 삶의 핵심이며 아주 당연한 요소라고 여기는 일 개념의 지위에 의심을 하자는 것이다. 이는 무책임해지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율적인 활동 공간을 넓히자고 하는 것이다. 저자는 절대 일에 담긴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다만 일 개념의 절대적인 지위로 인해 인간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고 진정 유용한 활동에 참여하지 못한 채로, 대다수의 사람들이 고통받으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 생산방식은 모두가 편안하고 안전하게 살아갈 가능성을 보여주었지만, 그 대신 우리가 선택한 것은 과로하는 소수와 굶주리는 다수를 만들어내는 쪽이다. 우리는 여태 기계가 등장하기 전과 다름없이 열심히 살아왔다. 이렇게나 어리석었지만, 언제까지나 계속 어리석게 살라는 법은 없다.” -버트런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1935)
저자에 따르면 19세기 초부터 많은 학자들이 인간의 이상적 삶과 산업 자본주의의 일의 실제 경험 사이의 격차에 주목하면서 더 나은 삶에 대해 끊임없이 논의해 왔다. 산업사회가 도래하기 한참 전인 1516년에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필요한 만큼 생산하고 넘쳐나는 상품은 생산을 제한하며, 필수 노동을 인구 전체에 공평하게 나누고 고된 노동을 줄이는 사회를 묘사했다. 케인스는 생산기술의 향상에 따라 2000년대에는 노동시간이 주 15시간까지도 줄어들 것이라며 장밋빛 예측을 했다. 하지만 인류 역사에 전례 없는 기술적 진보의 시대에도 민중들의 삶은 여전히 억압과 노동으로 가득 차 있다. 기술보다 중요한 것은 역시 정치적인 의지라는 걸 알 수 있다.
앙드레 고르가 보기에 현대 고용 중 상당수가 전혀 쓸모없다. 다 사용하지도 못할 만큼 너무나 종류가 많고 수명이 짧은 소비 물품을 생산, 홍보, 유통하는 일이 노동시장에서 거대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일의 지위를 굳건히 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필요 없는 필요를 생산하기도 한다. 일자리 창출은 사회의 필수과제로 인식하지만, 과연 그렇게 일 자체가 대단한 것이냐고 저자는 묻는다. 이렇게 환경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다양한 위기가 닥친 이 시기에 산업 시대의 낡은 일 윤리는 아직도 강력해서 우리를 고용에 골몰하게 하며 질문을 차단한다. (워라밸 논의는 이러한 문제를 개인 차원에서만 인식하게 한다)
생산성이 극도로 발달한 사회에서도 여전히 모두가 평생 일하며 살아야 하는지, 책을 읽으며 현대인으로서 나의 뇌에 박힌 일의 개념에 처음으로 질문을 던져본다. 친구의 생일에 돈을 들이지 않고 정성껏 편지에 그림을 그리고 밀랍초를 만들었다. 친구 얼굴을 그리느라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자기 시간이 늘면 우리는 스스로 필요를 충족하고 관계에 충실할 수 있다. 이 시간이 늘어나면 민주주의 역량 또한 높아질 것이다. 이 체제에는 좋지 않은 일이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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