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부터 산업화 이전 만감의 농민노동자 정서를 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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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부터 산업화 이전 만감의 농민노동자 정서를 심다
  • 정세훈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5.06.19 08:02
  • 호수 895호 (2025년 06월 19일)
  • 10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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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를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는 이동순 시인의 첫 번째 시집 〈개밥풀〉
<strong>정세훈</strong><br>시인, 노동문학관장, 칼럼·독자위원<br><br>
정세훈
시인, 노동문학관장, 칼럼·독자위원
 

“아닌 밤중에 일어나/실눈을 뜨고 논귀에서 킁킁거리며/맴도는 개밥풀/떠도는 발끝을 물밑에 닿으려 하나/미풍에도 저희끼리 밀고 밀리며/논귀에서 맴도는 개밥풀/방게 물장군들이 지나가도/결코 스크램을 푸는 일 없이/오히려 그들의 등을 타고 앉아/휘파람 불며 불며 저어가노라/볏집 사이로 빠지는 열기/음력 사월 무논의 개발풀의 함성/논의 수확을 위하여/우리는 우리의 몸을 함부로 버리며/우리의 자유를 소중히 간직하더니/어느 날 큰 비는 우리를 뿔뿔이 흩어놓았다/개밥풀은 이리저리 전복되어/도처에서 그의 잎파랑이를 햇살에 널리우고/더러는 장강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어디서나 휘몰리고 부딪치며 부서지는/개밥풀 개밥풀 장마 끝에 개밥풀/자욱한 볏짚에 가려 하늘은 보이지 않고/논바닥을 파헤쳐도 우리에겐 그림자가 없다/추풍이 우는 달밤이면/우리는 숨죽이고 운다/옷깃으로 눈물을 찍어내며/귀뚜라미 방울새의 비비는 바람/그 속에서 우리는 숨죽이고 운다/씨앗이 굵어도 개밥풀은 개밥풀/너희들 봄의 번성을 위하여/우리는 겨울 논바닥에 말라붙는다”

역사와 사회를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는 이동순 시인이 1980년 출판사 창작과비평사에서 ‘창비시선’ 24번째로 출간한 첫 시집 <개밥풀>의 표제 시다. 시집에는 표제 시 ‘개밥풀’을 비롯해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마왕의 잠’과 그 연작시 ‘올챙이’, ‘앵두밥’, ‘애장터’, ‘쑥의 미학’, ‘장날’, ‘보리밟기’, 장시 ‘검정 버선’ 등 일제강점기부터 6·25 이후 산업화 이전 우리 사회의 전통 농경 농촌 농민노동자의 만감 어린 정서를 심은 시편들을 가득 담았다. 그리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다.

시집에 대해 이태수 시인은 ‘역사적 현실을 바라보는 시인’이라는 제목의 시집 발문에서 “그가 제시하는 고통의 실체는 우리의 역사나 사회를 개혁하려는 의지를 내포하고 있으며, 인간성의 상실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끌어안고 있기도 하다”며 “그는 때로는 인간 사이의 신뢰, 또는 믿음과 사랑으로 결속된 공동체 의식의 회복을 부르짖기도 한다”고 평했다.

또한 권일송 시인은 뒤표지 글에서 “이동순의 <개밥풀>을 읽고 나면 왜 그리 서러운지, 거짓 없는 자신들의 살갖의 체험과 땡볕에 버려진 모국어의 상처들이 알알이 나타나 있다”고 논했으며, 염무웅 평론가는 “보잘 것 없는 식물의 리얼리스틱한 묘사를 통해 억압과 멸시에 시달리면서도 끈질긴 생명력으로 버티어나가는 존재의 설움과 지혜를 보여준다. 섬세한 감각, 언어의 운율적 조직 자체가 모든 살아있는 것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평했다

시인은 1950년 6월 경북 김천(금릉)에서 출생했다. 경북대학교 국문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으로 등단했으며. 198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됐다. 시집 <개밥풀>, <물의 노래>, <지금 그리운 사람은>, <맨드라미의 하늘>, <철조망 조국>, <그 바보들은 더욱 바보가 되어간다>, <봄의 설법>, <꿈에 오신 그대>, <가시연꽃>, <기차는 달린다>, <아름다운 순간>, <그대가 별이라면>, <미스 사이공>, <마음의 사막>, <발견의 기쁨>, <묵호>, <멍게 먹는 법>, <마을 올레>, <강제이주열차>, <좀비에 관한 연구>, <독도의 푸른 밤>, <신종족>, <고요의 이유>, <생각만 해도 신나는 꿈>, <어머니> 등과 평론집, 에세이집 등 다수를 발간했다. 제1회 김삿갓 문학상, 시와시학상, 경북문화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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