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박사
전 충남도의원
필자가 도의원으로 근무하던 시절, 어느 날 말끔히 차려입은 노신사가 의원사무실로 찾아왔다. 서울에서 살고 있다는 노신사는 “자네에게 꼭 전할 말이 있다”며 6·25 당시의 이야기를 약 2~3시간 정도 생생하게 들려주며 “자네 삼촌하고 나하고 어릴 적부터 윗집, 아랫집 간 이웃으로 친하게 지냈는데 6·25 전쟁 시 북한 인민군대 의용군으로 희생돼 참 안타깝다는 것을 전해주려고 찾아왔다”고 말했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노신사와 우리 삼촌은 마을청년들과 북한 인민군 치하에 의용군이라는 명목으로 캄캄한 밤중에 홍성읍 모 초등학교에 집결했는데 대부분 20세 전후의 혈기 왕성한 젊은 청년들로서 홍성군 내에서 끌려온 수백 명의 청년들이 집결됐다고 전해주셨다. 그 당시 집결된 청년들은 인원 점검을 마치고 집결지를 출발해 조양문을 지나 홍성역에서 기차를 타고 이동했다.
조치원역쯤에서 잠시 정차했을 때 몇 청년들은 ‘낙동강 전투에 참여하면 총알받이로 어차피 죽는다’라면서 기차가 정차하자마자 논으로, 밭으로, 산으로 죽을힘을 다해 탈출했는데 탈출을 시도한 사람들에게는 탈영병이라며 따발총을 난사해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때 탈출한 노신사는 기차가 떠날 때까지 죽은 사람들과 함께 논바닥에 죽은 체하며 누워 있다가 인민군대 의용군에 갔던 사람들 중 노신사와 같이 탈출한 수십 명 중 단둘만 구사일생으로 살았다고 전하며 “너희 삼촌은 전쟁터로 가는 그와 중에 우리를 살리려고 자신은 탈출하지 못하고 낙동강 전투에 총알받이로 희생됐을 것”이라며 “너무나 아까운 친구”라고 회상하면서 “나만 살았다”고 눈시울을 적셨다.
노신사는 조치원에서 공주를 거쳐 약 십수 일을 걸어서 낮에는 산에서 숨어 계곡의 물과 풀을 먹으며 연명하고 밤에는 신작로를 따라 홍성쪽으로 간신히 올 수가 있었는데 친척집 벽장과 굴속에 숨어 있었는데 다시 잡혀갈까 봐 사람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두근두근 거려서 한숨도 못잤다고 한다.
그러다가 서울이 수복돼 집에 무사히 갈 수가 있었다고 하며, 전쟁이 끝난 후 세무소에 말단 사환으로 취직해 나중에는 간부로 퇴직했다고 한다. 6·25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경험하신 우리 삼촌과 절친이었다는 노신사의 말씀을 들으며 필자 역시 한없이 눈물이 흘렀다. 사랑하는 부모 형제 가족과의 이별, 좋은 친구와의 이별은 마음에 영원히 남아 죽을 때까지 잊지를 못하는 것 같다.
노신사는 “너의 삼촌은 유난히 효심이 강하고, 얼굴도 잘생기고 키가 훤칠할 뿐만 아니라 운동도 잘하고 총명했으며, 공부를 매우 잘한 우수생이었다”며 “만약 북한에 살아 있다면 반드시 고향집 어머니와 형제 동생 가족을 찾아서 돌아왔을 것”이라며 “인민군대 의용군에 끌려가기 전 학창시절에 노신사와 우리 삼촌이 함께 집 앞에 각각 한그루씩 측백나무 2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필자의 할머니가 생존해 계실 때 “너의 삼촌은 저 측백나무를 보고 반드시 찾아올 거야. 반드시”라면서 매일 밤마다 삼촌의 이름 석 자를 섧게도 부르면서 애타는 모정을 바라볼 수 있었다. 어쩌다가 측백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면 “저 나무에 내 아들이 찾아왔나 보구나!”하며 “오늘따라 왜 저렇게 나무가 흔들리지?”하며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생각하며 눈시울을 글썽거리면서 우리 아들은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저 측백나무만은 베지 말라고 유언을 하기도 하셨다.
그러나 주택개량사업으로 그 측백나무는 베어졌다. 삼촌이 심은 두 그루의 상록수를 베어내서 고향 집이 어딘지 몰라 삼촌은 못 돌아왔을까? 필자의 부친도 일제강점기 징용으로 북해도 지하탄광과 형제자매들은 남양군도로 끌려갔었다. 해방이 안 됐으면 그때 다 죽었을 거라는 말씀이 귓전에 가득하고 삼촌도 6·25 전쟁으로 끌려가 생사 불명됐으니 우리 아버지 형제의 세대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으면서 시대적으로 참으로 기구한 삶을 사신 분들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
몇 년 전에 아버지 형제들은 모두 다 저세상 하늘나라로 가셨다. 이 세상에 영혼이 있다면 아버지 형제들은 삼촌과 가끔 고향 집에서 다시 만나 만남의 기쁨을 누리고 계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