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는 지역이, 혜택은 수도권이”… ‘전력 식민지’ 논란 확산

[홍주일보 홍성·예산=김영정 기자] “우린 전기를 쓰지도 않는데, 왜 희생은 우리가 져야 합니까?”
충남 홍성·예산 주민들이 새만금 재생에너지 송전선로 건설계획에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이미 화력발전과 송전선 피해를 감내해 온 지역에 또다시 ‘전력 통로’ 역할을 강요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이유다.
지난달 27일 홍성과 예산의 시민단체와 주민들이 거리로 나섰다.
본지 888호(2025년 5월 1일 자) 2면 <송전선 건설에 지역주민들 ‘반발’> 제하의 기사와 관련해 한국전력이 새만금에서 생산된 재생에너지를 수도권으로 실어 나르기 위한 초고압 송전선로를 건설하겠다는 ‘새만금#2-신서산 송전선로 건설사업’ 계획을 내놓으면서, 충남은 이미 화력발전과 기존 송전선로로 수많은 피해를 입고 있는 지역임에도, 경과지로서 ‘송전선로’라는 고통을 또다시 떠안게 됐기 때문이다. 시민단체와 주민들은 이를 ‘수도권 전력 식민지화’라고 규정하며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다.
이날 오전 홍성군청과 예산군청에서 각각 열린 기자회견에는 예산홍성환경운동연합, 충남환경운동연합, 홍성YMCA, 예산군농민회, 홍성녹색당, 조곡산단반대대책위 등 지역 시민사회와 주민들이 대거 함께했다.
참석자들은 ‘새만금-신서산 345kV 송전선로’와 함께 충남 내륙과 경기 서남부를 관통할 것이라 계획된 ‘청양-고덕 구간 송전선로’ 계획도 철회할 것을 한목소리로 요구했다.
이번에 추진되는 송전선로는 전라북도 새만금 일대에서 생산되는 대규모 태양광·풍력 발전 재생에너지를 수도권으로 실어 나르기 위한 국가 계획의 일환이다. 하지만 홍성과 예산은 전기를 소비하지도 않으면서 단지 수도권으로 전기를 보내는 경로에 있다는 이유로 주민 피해만 감수해야 한다는 점에서 지역 사회의 강한 반발을 사고 있다.
충남은 이미 전국에서 가장 많은 전기를 생산하는 지역이다. 당진, 보령, 태안, 서천 등에는 화력발전소가 밀집해 있어 그동안 주민들은 미세먼지, 온실가스, 송전선로 전자파와 소음, 지가 하락 등 크고 작은 피해를 감내해 왔다.
그럼에도 정부가 ‘에너지 고속도로’라는 미명하에 재생에너지 전력을 수도권 대기업의 RE100(전 세계 기업들이 자신들의 사업장에서 사용하는 전력의 100%를 재생에너지로 조달하겠다는 친환경 약속) 충족을 위해 끌어가려 한다는 점은 지역사회에서 “지역을 전력 식민지로 만든다”는 분노를 부르고 있다.
홍성군청 기자회견에서 황성렬 충남환경운동연합 상임대표는 “호남에서 생산되는 재생에너지를 굳이 수도권까지 끌어가겠다는 발상 자체가 잘못됐다”며 “필요한 기업들이 전기가 있는 지역으로 옮겨야 한다. 충남에 남는 전기가 있으면 도내 기업들이 쓰고, 그래도 남으면 수도권으로 보내는 게 합리적”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예산군청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도 비슷한 우려가 쏟아졌다. 신규용 신부(예산홍성환경운동연합 운영위원)는 “예산은 이미 765kV 초고압 송전탑이 가득 지나가는데 또 다른 송전선로가 들어선다면 피해는 돌이킬 수 없게 된다”며 “주민 동의도 없이 경과지만 된다는 것은 결국 농촌과 지역민의 희생을 전제로 한 개발 논리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장동진 예산군농민회 회장은 농업군으로서의 위기를 호소했다. 그는 “예산은 넓은 농경지가 많다 보니 송전탑이 주로 농토 위로 지나가고, 결국 피해는 고스란히 농민들 몫이 된다”며 “정작 우리는 쓰지도 않는 전기를 위해 농토와 마을을 내주는 현실은 국가적 낭비이자 불평등”이라며 분개했다.
귀촌인 고희숙 씨의 발언은 참석자들의 마음을 울렸다. 그는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꽃과 나무를 심으며 살았는데 이제 곁에 산업단지, 폐기물 매립장, 그리고 또 송전선로까지 들어온다고 한다”며 “예산은 살기 좋은 고장이었지만 지금의 모습은 귀촌인들을 떠나게 하고 주민 삶의 질을 무너뜨리고 있다. 더 이상 희생을 강요하지 말라”고 호소했다.
이날 홍성과 예산 두 지역 기자회견에서 제시된 주요 요구사항은 일관됐다. △충남을 경과지로 하는 새만금-신서산, 청양-고덕 송전선로 계획 전면 철회 △지역별 전기요금 차등제 도입을 통한 기업 지방 이전 유도 △송전선로 입지선정과 비용 배분의 투명성 확보 △지역에서 생산한 전기를 지역에서 소비하는 분산형 에너지 체계 구축 등이다.
특히 참석자들은 “전기는 생산 즉시 소비되는 에너지이므로 송전 거리가 짧을수록 효율적”이라며 “생산지-소비지를 일치시키는 방향이 탄소중립에도 부합한다”고 강조했다. 장거리 송전 방식은 주민 갈등과 사회적 비용을 키우고 재생에너지 확대에도 걸림돌이라는 지적이다.
이날 홍성과 예산에서 잇따라 열린 기자회견은 충남 전역의 연속적 행동의 일환이다. 충남환경운동연합과 지역단체들은 서천·보령·천안 등에서도 기자회견을 이어갈 예정으로, 주민 참여 확대와 여론 조성을 통해 정부와 한전을 압박한다는 계획이다.
주민들과 시민단체의 요구는 단순한 ‘송전선로 반대’가 아닌 지역의 일방적 희생을 중단하고 생산과 소비가 함께하는 자립형 분산 에너지 체제 구축을 촉구하고 있다.
한편 한전은 ‘새만금#2-신서산 송전선로 건설사업’과 관련해 지난 4월부터 사업구역에 포함된 충남 10개 시·군과 전북도 3개 시, 총 13개의 지자체를 순회하며 주민설명회를 진행했고 지난 6월 송전선로 입지선정위원회를 구성 송전선로 입지선정을 위한 회의를 이어가고 있다.
오는 9~10월경 송전선로 노선에 대한 구체적 윤곽이 나올 것이라 예상되는 가운데 전력 수급 안정이라는 공익과 송전선로 주변지역 주민의 건강권과 재산권, 환경권 보호의 가치가 충돌하고 있어 지역사회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