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 청운대학교 영미문화학과 교수
칼럼·독자위원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이하 케데헌)’가 미국, 영국을 비롯한 200여 개국 넷플릭스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대중의 큰 호응을 얻는다는 것은 재미있거나 공감할 수 있는 요소들이 많다는 의미일 것이다. 재미있는 요소들은 노래를 따라 부르고, 춤추고 싶은 충동을 유발한다. 완성도 높은 OST는 미국 빌보드 메인 앨범 차트 ‘빌보드 200’에서 2위를 차지했고, 주요 수록곡들은 ‘핫 100’ 차트 상위권에 진입했다. 특히 ‘골든’과 ‘유어 아이돌’ 같은 곡은 영화 자체의 인기를 더욱 끌어 올리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OST가 먼저 글로벌 차트를 점령하고, 대중의 감정을 자극해 다시 영화 스토리와 캐릭터를 살펴보게 하는 선순환 고리를 형성했다.
음악적 요소만이 아니라 ‘케데헌’에는 남산의 서울타워, 한복, 한글, 한국의 전통무기, 호랑이, 까치, 김밥, 무당 등과 같은 한국적 요소들이 곳곳에 산재(散在)해 있다. 이런 배경에 신기함을 느끼는 외국 팬덤은 김밥과 라면을 먹고, 한복을 입고 서울의 거리를 활보하고 싶을 것이다. 한국의 정신과 문화, 상품이 세계 곳곳에 더욱 진출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동안 ‘한류’에서 외국 팬덤이 주로 한국 아이돌 노래를 따라 불렀다면 ‘케데헌’에서는 한국의 문화적, 정신적 요소를 공감하면서 각자의 방식으로 캐릭터와 장면을 재해석해 보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백범 김구 선생은 그의 자서전 《백범일지》에서 대한민국이 군사적 강국이나 경제적 부강국이 아니라 “문화강국”이 되길 소원한다고 말했다. 김구의 소원처럼 ‘케데헌’은 글로벌 스트리밍 플랫폼 1위를 차지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고급문화는 주변에 영향을 끼친다. 신화와 전설이 많은 민족의 문화는 스토리텔링으로 후세와 이웃 나라에 전달된다. 새벽에 귀신이 나타나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달라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이나, 마녀들이 나타나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하는 《맥베스》 같은 극들은 40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매일 무대에 올려지고 있다. 단군신화를 비롯한 많은 전설은 우리나라에서도 민속문화의 밑그림 역할을 하고 있다. 신이 인간세계로 내려와 악령을 내쫓고 질서를 세운다는 구조는 무속 서사에 광범위하게 스며들어 있다. ‘케데헌’에도 이런 악령을 퇴치하려는 인간의 보편적 정서가 그 바탕에 깔려 있다.
인간의 영혼을 파먹는 악령을 물리치라는 임무를 받은 아이돌 헌트릭스(Huntrix)는 무당이나 샤먼처럼 혼문(魂門, 영혼의 문)을 지키는 전사(戰士)이자, 도시와 사람들의 정신적 안녕을 지키는 수호자의 역할을 한다. ‘케데헌’이 시작되자마자 세 명의 한국 무당이 무녀 옷을 입고, 한바탕 춤판을 벌인다. 이 무당도 인간과 신령 세계를 연결하여 억울한 영혼의 한을 풀어 주는 존재다. 헌트릭스의 리더인 루미와 무당의 이미지가 오버랩된다. 루미를 현대판 무당으로 보면 어떨까? 루미가 활동하는 곳에는 한국적 요소들로 채워져 있다. 근정전과 일월오봉도는 왕권과 국가 정통성을 상징하는 것이어서 루미의 악령 퇴치가 단순한 액션물이 아니라 한국의 역사·정통성과 연결돼 있음을 암시한다.
루미는 ‘사자 보이스(Saja boys)’라는 악령들과 맞서 싸운다. 이는 무당이 귀신을 쫓아내는 ‘퇴마’의 기능과 맞닿아 있다. 여기서 ‘사자(Saja)’는 ‘사자(lions)’을 가리킬 수 있지만(애니메이션의 공연장에는 사자의 엠블럼이 등장한다), 죽은 사람 ‘사자(死者)’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사자 보이스’는 지하 세계에 사는 악령들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감독은 ‘사자 보이스’라는 이름에 두 가지(lions. 死者)를 다 포함하도록 하는 ‘펀(pun, 말재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루미는 몸에 있는 무늬로 보아, 절반은 악령의 모습으로 태어났다. 그런 루미가 악령들로부터 ‘혼문’을 지켜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인간의 내면에 선한 면과 악한 면이 있듯이, 악령 루미는 스스로의 갈등을 겪으며 동료들과 불화를 해소하면서 리더로 성장해 가는데, 이런 모습은 ‘빌둥스로만(Bildungsroman)’의 주인공들과도 닮아있다. 절반은 악령이면서 악령과 싸워나가야 하는 루미는 오히려 악령적 무늬를 숨기지 않고 무대 위에서 ‘빛과 어둠이 함께하는 상징적 퍼포먼스’로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화려하게 전환한다. 이 장면은 아이돌로서의 ‘콘셉트 무대’이자 퇴마사로서의 ‘자아해방’이 겹쳐지는 ‘메타드라마(metadrama)’적 절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케데헌’은 아이돌이 성장하는 일상생활의 모습을 차용(appropriation)하면서 악령을 물리치는 오컬트(occult) 판타지, 무당, 갓, 호랑이 등과 같은 한국 전통 문화코드를 버무려 대중을 애니메이션에 빠져들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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