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재(仁智齋)의 춘란(春蘭)-지산(志山) 김복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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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재(仁智齋)의 춘란(春蘭)-지산(志山) 김복한
  • 구재기 시인
  • 승인 2013.10.31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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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재기 시인과 함께하는 시로 찾는 ‘너른 고을 홍성’ <19>

 


호수 가득 잔물결 일 듯
배꽃이 햇살로 내리던 마을
한겨울 푸른 솔숲 아래
하얀 눈 소복소복 덮여 있다

수상한 시절을 지나면서
바른 길을 헤아리지 못하면
기울어져가는 세상 속에서
바르게 서지 못하는 법*

몸 감은 흰두루마기를
어찌 검게 할 수 있겠는가
부모님으로부터 이어받은
머리칼을 어찌 잘라내겠는가

일을 도모함이 치밀하지 못하여
비록 갇히는 몸이 되었으나
만약 가볍게 하였다고 죄를 준다면
이는 지금에라도 달게 받으리라**

고즈넉한 인지재 뒷뜨락
한겨울 짙은 솔숲 아래
더부룩 쌓인 흰 눈 속에서
춘란 새 촉, 여기저기 솟고 있다

* 선생은 파리장서 건 후 공주 감옥에서 나와 '인지재(仁智齋)'를 세워 유생들의 의병 격문과 상소문 등을 편집하여 '주변록(主邊錄)'이라는 교재를 엮어 "초학자가 시의(時義)를 알지 못하면 쇠망해 가는 세상에 서기 어렵다"고 가르치면서 항일민족이념을 고취하였다.
** 선생의 법정 진술 중에서(1896.2.25.고등재판소)
김복한(金福漢.1860~1924) 선생은 홍성군 갈산면에서 안동김씨 봉진(鳳鎭)과 연안이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원오(元吾)이고, 호는 지산(志山)이다. 남당 한원진의 학맥을 이어 학문적으로도 일가를 이룬 그는 33세에 별시문과에 합격한 이후 교리를 걸쳐 형조참의, 승지에까지 올랐으나 일본이 조선의 내정에 간섭을 하던 갑오년 4월에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왔다.그러나 일제가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위하여 갑오변란과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끝내는 일제에 의해 세워진 친일 내각이 갑오, 을미개혁의 일환으로 변복령과 단발령을 공포하자 1895년 12월 1일 이설, 안병찬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가 홍주 감옥에 투옥된 후 경성 감옥으로 이송되어 10년형의 유배형을 받았으나 고종의 특사로 석방되었다.일제가 식민지 획득을 위한 제국주의적 침략을 노골화하자 12월 2일 이설과 함께 상경하여 일본 세력을 축출하고 왕실을 회복하자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렸다. 1906년 5월 민종식을 의병장으로 한 의병 부대를 지원함으로써 홍주성을 점령하는 쾌거를 올렸으나 끝내 다시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이후 '인지재(仁智齋)'라는 학당을 새로 세우고 후진을 양성하다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영남과 호서의 유림들과 함께 장서운동을 벌여 공주 감옥에 3번째로 수감되었다. 1975년 김복한 선생의 옛 문하생을 중심으로 한 지방의 유생들과 역대 군수들의 주선으로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 산 70-9에 '추양사(秋陽祠)'라는 사우(祠宇)를 건립하고 그의 영정을 봉안한 이래 정부의 주관으로 주변 정화사업을 거듭, 1984년 5월 지산 김복한 선생 묘소와 추양사를 도지정 문화재 169호로 지정 관리하는 한편 2007년에는 홍성읍 대교리 대교공원에 파리장서기념비를 세우고 매년 추모제향을 올리고 있다. 추양사 위에는 김복한 선생의 묘가 자리한다. <칼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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