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읍성(洪州邑城)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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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읍성(洪州邑城)에서
  • 구재기 시인
  • 승인 2014.04.24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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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재기 시인과 함께하는 시로 찾는 ‘너른 고을 홍성’ <42>

 


살아있는 솔숲에
바람이라도 오는 날이어야 했다
얼마나 저린 가슴으로 살아 왔더냐
이름 모를 산새들의 울음에
자꾸만 젖어드는 달빛 속
소리마저 잃어버린 채
온밤을 눈물로 헤매었다

어미를 잃어버린 날이었다
아비를 잃어버린 날이었다
두 눈을 바로 떠라,
눈을 떠 보아라, 아들아, 딸들아.
머리칼 한 오라기까지
남김없이 흩뜨리며 오가는 바람인 양
지새우던 울림, 병오년(丙午年),
그 엄청난 눈맞춤의 세월도 가버렸구나

한숨도 못 이루고
가슴 깊이 품어왔던
결, 곱디고운 푸른 숨결이
살아 오르는 달빛인 양
바람이라도 심히 오는 날이어야 했다
할미도 할아비도
박달나무 방망이 하나씩 들고
마늘 같은 향기로
쑥즙 같은 맛으로
이 땅을 지키고자 했던 날
짐승 같은 눈이라도 오는 날이어야 했다



홍주읍성은 홍성의 진산인 백월산이 동쪽으로 이어지면서 홍성천(洪城川)과 월계천(月溪川)을 경계로 자연스럽게 해자(垓字)로 이용하면서 조성된 구릉 둘레 성이다.
이 홍주읍성이 최초로 쌓은 연대는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아니하다.『세종실록지리지』<읍성조(邑城條)>에 따르면 ‘읍성은 석축으로서 둘레가 533보 2척이며 성안에 우물이 하나 있는데 여름이나 겨울에도 마르지 않는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홍주읍성의 존재와 함께 대략적인 규모를 짐작케 한다. ‘문종실록’권9 원년 9월 경자조경자조의 기록에 새롭게 신축한 홍주읍성의 규모는 둘레가 4856척이고, 높이는 11척이며, 여장의 높이가 3척이다. 문은 4개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옹성이 없다. 성내에는 우물이 두 개가 있고, 작은 개울도 흐르며, 해자는 따로 시설하지 않았다. 현재 홍주읍성 안에 남아있는 수성기적비(修城紀績碑)의 기록에 의하면 ‘현종대에 이르러 한계수(韓桂洙)에 의하여 중수되고, 조선 순조 24년(1824)에 진장 김계묵과 목사 이헌규에 의하여 수리되었으며, 고종 7년(1980)에 목사 한응필이 조양문(朝陽門)을 짓고 경의문(景義門), 망화문(望華門)과 관영(官營)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당초 성안에는 35동의 관아 건물이 있었으나, 그 중에 조양문(朝陽門), 홍주아문(洪州衙門), 안회당(安懷堂), 여하정(如何亭) 등 4동의 건물만이 남아 있다. 현재 남아있는 동문인 조양문은 팔작지붕에 다포계 건물로 정면 3칸의 문루(門樓)로서 고종 7년(1870)에 한응필이 개수하였고, 현판은 대원군이 친필로 하사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1975년에 해체 복원되었다. <칼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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