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성 아문(洪州城 衙門)에 기대어
상태바
홍주성 아문(洪州城 衙門)에 기대어
  • 구재기 시인
  • 승인 2014.10.10 16: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구재기 시인과 함께하는 시로 찾는 ‘너른 고을 홍성’ <65>

작은 풀 한 포기와
하늘의 빛 한 줄기가
이슬 속에 머물고 있는데
함께 한 뜻이 다를 게 무엇이랴

여하정 연못은 애당초
달을 머물게 할 뜻이 없었지만
옛 숨소리들은 달과 함께
물속에 스며 머물러 있고

먼지는 항상 쌓이는 법인데
비구름은 제 스스로
제 짐을 벗어버렸는지
빈 하늘에는 어떤 흔적도 없다

순간에는 시간도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순간으로 웃는 얼굴은
칼을 품은 가슴보다 더 용감한 것

그렇다,
홍주성 아문에 기대어
지나는 발걸음을 바로 볼 일이다
이슬처럼 맑고 밝은 빛을 품고
빈손을 세상에 내보이는 일이다

 

 

 


1972년 10월 14일 사적 231호로 지정된 홍주성은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에 있다. 처음 지어진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백제, 문종 원년(1451)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성은 길이 약 1,772m의 성벽 중 약 800m의 돌로 쌓은 성벽의 일부분이 남아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홍주성의 둘레가 533보 2척이며, 사철 마르지 않는 샘이 하나 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조선 초기 지방 행정 구획을 개편하면서 왜구의 침입이 예상되는 고을의 읍성을 새로운 격식에 맞추어 쌓게 되었던 세종 때에 처음 쌓기 시작하여 1451년(문종 원년)에 새로 고쳐 쌓았다.

당시 성의 규모는 둘레가 4,856척[약 1.5㎞], 높이는 11척[약 3.3m]이며, 여장(女墻) 높이 2척, 적대(敵臺) 24대 가운데 6대만 쌓고, 문 4개 중 하나는 옹성(壅城)이 없으며, 여장 608, 성 안에 우물 2, 작은 개울 하나가 있다. 그 후 현종 때 한 번 중수했고, 1870년(고종 7) 목사 한응필(韓應弼)이 조양문(朝陽門)을 짓고 이어 경의문(景義門)․망화문(望華門)과 관영(官營)을 지었다고 한다.

지정 면적은 46,961㎡(약 14,231평)이다. 이 홍주성은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읍성으로 이어졌으며, 조선 초기 새로운 형식에 의해 쌓은 성이 남아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동문인 조양문은 현재까지 남아있는 유일한 홍주성 성문으로 1975년 복원되었으며, 2013년 12월 3일 홍주읍성 남문인 홍화문(洪化門)이 복원을 마치고 준공되었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 남문터 발굴조사를 벌여 과거 남문의 형태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가 있는 성문으로 존재했음을 확인한 이후 2011년 실시설계를 완료하고 2012년 11월부터 복원공사에 착수하여 사업비 15억원이 투입된 홍주성 남문 복원사업은 문루 약 40㎡, 여장 55m를 복원하는 것으로 소광장 346㎡, 남문진입로 122m, 배수로 석축 정비 등이 함께 진행되었다. 군민 설문조사와 향토사학자 등이 참여한 가운데 남문 명칭 자문회의를 통해 남문 명칭을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홍성의 앞날을 상징’하는 ‘홍화문(洪化門)’으로 결정했다.

  

 

 

 

홍주아문은 조양문의 문루를 설치할 때 함께 세운 것이며 ‘홍주 아문(洪州衙門)’이란 글씨는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이 직접 썼으나 현재 남아있지 않다. 우리나라 아문 중에서 가장 크고 특이한 형태를 지니며 조선 시대 관아의 구조와 형태를 살필 수 있는 자료가 된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乙巳條約) 체결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킨 민종식(閔宗植, 1861~1917) ․ 이세영(李世永) 등이 이 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덕산으로 격퇴시킨 일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