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향인 인터뷰 - 사람이 희망이다<14>
문인화가 갈산(갈미) 조문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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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화가 갈산(갈미) 조문희 화백
  • 장윤수·김경미 기자
  • 승인 2015.10.22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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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화가 갈산(갈미) 조문희 화백

그래서 가을에 국화향기가 그렇게 진한가 보다
 

▲ 조문희 화백.

고교시절부터 그림에 매료돼 화가의 꿈 독학으로 이뤄
1985 동아미술제 문인화부문 ‘난(蘭)’ 동아미술상 수상


백월산 자락의 환하게 트인 곳에 자리한 단아하고 정갈한 ‘갈산난야화소’에서의 조문희 화백과의 만남은 문인적인 올곧은 열정에 대한 삶의 편린을 가슴속에 오랜 시간 숨겨야 했다. 화실에 들어서면 서화에 눈치가 있다면 펼쳐진 화선지와 붓, 그리고 화집과 발문에 눈이 멈추면서 화단과 평단의 알만한 이름들 사이로 조 화백의 그림들이 시선을 잡아 세운다.

중국 명말(明末)의 대표적 문인 동기창(董其昌)이 ‘화지(畵旨)’에서 문인화가의 계보에서는 시인이며 그림에도 능했던 당(唐)나라의 ‘왕유(王維)’를 첫손에 꼽았고, 원말 4대가의 출현으로 산수화 양식의 전형이 완성되면서 남종화(南宗畵), 남화(南畵)라 불리며 비로소 특유의 양식으로 정착된 문인화(文人畵)의 새로운 맛을 정말 오래 만에 느낄 수 있어서 호기심이었다. 문기(文氣) 넘치는 김정희(金正喜)의 난(蘭)이 화가 조문희(趙文姬)의 필묵(筆墨)에서 겹치고 있다. 여성 특유의 체취가 묻어나는 듯한 섬세한 필치에 선비적 문기가 녹아들었다. 허난설헌(許蘭雪軒)과 신사임당(申師任堂)같은 여류작가들이 마음가짐으로 담았던 고매함과 여인스러운 체취가 아마도 시서화일체(詩書畵一體)가 어우러져 평소 삶의 자세로 스민 학문적 품성의 문기(文氣)가 조문희 화백의 화폭에 필묵으로 표현되고 있었기 때문일까.

예술도 삶처럼 정형화되면 안 되지만 사실은 정형화되고 있는 걸까. 갈산면 운곡리가 고향인 문인화가 조문희(66) 화백은 갈산초(41회), 갈산중(11회)을 마치고 서울 유학길에 올라 서울여상을 졸업했다. 2년 정도의 직장생활을 하다가 결혼을 했고, 고교시절부터 그림에 매료된 꿈을 독학으로 이룬다. 10여 년을 자신의 아파트 안방의 화실에서 한남자의 아내로 자식을 둔 어머니로 부모를 모시는 며느리로서의 역할을 다하며 어려움과 난관을 스승으로 그림에 빠졌다. 마침내 1984~85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연속 특선에 이어 1985년 동아미술제 문인화부문에서 ‘난(蘭)’으로 동아미술상을 수상하면서 ‘화가’의 꿈을 이루며 소위 말하는 ‘화단’이란 곳에 본격 등극했다. 당시 화단(畵壇)은 운필(運筆), 묵취(墨趣), 담채, 화면구성 등에서 남다른 창의성과 생동감을 보여 준 조문희의 그림에 대대적인 찬사를 보냈다. 어떤 소재에서나 붓놀림과 주제구성, 표현태도에서 남다른 방법의 창의성을 엿보게 한다. 매우 생동적이며 때로는 분방하게 운필되는 수묵필치와 필의의 자율적 형상, 생명감이 사군자를 비롯한 여러 소재를 문인화의 격조로 그리고 있다.

화단, 문단 등 ‘단’자가 들어가는 곳엔 으레 계파와 계보가 존재하는 법. 그러나 그는 제도권에도 정규 미술교육도 받지 않았고 흔히 말하는 한 스승으로 하여금 사사도 받지 않은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하지만 ‘성공한 화가’다. 지극히 평범한 진리를 실천한 제도권 밖에서 늘 외롭고 서러웠던 흔치 않은 화가다. 어려서 ‘고리짝’이라 부르던 ‘함’안에 부친이 쓴 붓글씨가 멋있어 보여 고교 재학시절 미술부 특활활동을 한 것이 ‘그림’의 출발이었다고 말한다.

조 화백의 앞에 펼쳐진 화선지에는 고통의 시간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은 의지가 매화, 국화, 조롱박, 석류, 수선화, 감 등 고향에 묻어둔 추억을 하나하나 꺼낸 듯 다양하고 다채롭다. 단아하고 간결하면서도 번짐과 갈필이 조화를 이루면서 발묵의 묘한 돋보임은 공간의 역동성과 긴장감으로, 생략과 여백의 여유에서는 한지와 순지, 화선지의 질감이 삶의 변화만큼이나 진지한 울림으로 다양한 필묵이 ‘화제(畵題)’를 감싼다. 조 화백이 말하는 작품세계에 대한 막힘없는 설명과 예술론은 다음 기회를 기약해야겠다. 관심과 변화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조문희 화백은 1994년 4월 아침 식사 중 뇌출혈로 쓰러진 남편이 2008년 6월 세상을 떠나기까지 가정사적인 고통의 시간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았다. 당시, 몰두한 것이 사경(寫經) 작업이다. 불경, 성경, 유가(儒家)의 고전, 헤르만 헤세의 소설까지 좋은 글들을 붓으로 베꼈다. 서울 개포동의 작은 화실에서 무려 15권의 책으로 묶여진 그의 사경집을 보면 숙연한 마음이 가슴을 쓰러 내릴 정도다. 특이한 것은 초기와 후기 작업의 글씨체가 완연히 다르다. “미친 듯, 글씨를 쓰다가 어느 순간, 어깨 힘이 좍 빠지면서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글씨체가 나오더라고요. 그전에는 그저 예쁘게 쓰려고만 했는데 그게 아니더라는 거지요. 그러면서 다시 그림을 생각했어요. 그동안 그렸던 그림들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갖게 된 거지요”라고 말한다.

그림 여기(餘技)아닌 구원의 수단 사경(寫經)작업 몰두
한글 화제(畵題) 누구나 쉽게 그림과 어울리며 음미해


매란국죽 사군자 옆에 시를 곁들이는 전통적 문인화에 매달려 있던 그는 그때부터 화폭 앞에서 자유로워졌다. 또한 삶의 고통 앞에서 자신 역시 비껴갈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자, 그림은 단순히 여기(餘技)가 아니라 구원의 수단이 되어 버렸다. 전통적 문인화 격식으로 주로 한시(漢詩)를 선택하여 곁들이던 것을 조문희 화백은 한글시로 하여 누구나 쉽게 그림과 더불어 어울리며 음미하게 하려고 한 점은 주목되는 특징 중 특징이다. 붓글씨 공부를 많이 한 저력으로 문인화 본래의 시서화(時書畵) 일치의 감상을 요구하는 동양적 전통주의를 계승하려는 조문희 화백은 그렇게 한글시로 오늘의 우리 문화상황에 부합시키고 있는 것이다. 가령, 국화그림에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의 한 귀절을 따서 써넣는가 하면, 석류를 소재삼은 화면에 이희승의 시조를 어울리게 가져와 그림과 시를 같이 감상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작례(作例)는 대개 간결한 소품이나 여백공간을 많이 남기는 화면에서나 보게 된다. 주제 자체나 화면 창조 자체에 충실하려고 한 현대적 작화(作畵) 행위에서는 형식적 전통의 그러한 제시(題詩) 도입이 배제된다.

최병식 미술평론가는 “조문희의 작업은 그 근간이 문인화이지만 한 번 더 조명해 들어가면 조선시대 여류들의 체취를 느끼게 하는 여성 특유의 필치와 일기(逸氣)가 있다. 그것은 학문이나 품성이 스며있는 선비적인 문기(文氣)와 더불어 남성과는 다른 정아(靜雅)한 고요와 섬세한 안목으로 녹여진 부드러움이기도 하다. 다시 말한다면 강한 자들의 힘과 형식을 껴안아 가는 모성적인 삶의 포용력과 너그러움이 여성적 섬세함과 어울려서 필묵으로 표현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요즈음 보여 지는 이러한 요소들은 의도적 형식이 아닌 자연스럽게 전통 속에 묻어오는 일종의 페미니즘적인 요소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조 화백의 작품은 공간 구성의 역동성, 긴장감, 과감한 생략 등에서 기존 작업들과는 다른 실험성이 돋보이면서도, 동양화 특유의 여유와 정화(淨化)를 준다”고 평했다.

서울 견지동 동산방 화랑에서 열린 세 번째 개인전은 집념을 가진 한 예술가의 혼을 확인하는 자리였다고 한다. 은은한 먹 바탕에 매화 꽃봉오리를 점들로 단순화한 ‘탐매(探梅)’ 시리즈나 감, 조롱박, 석류, 수선화 등을 소재로 그린 ‘고향에 묻어둔 추억’ ‘분노’ ‘추위 버티는 마음’ 등은 작가의 천변만화한 감정의 표현들이었다. 번짐의 효과를 보여주는 갈필은 단아한 겉모습과 달리 변화와 도전의욕에 가득 찬 그의 격정을 진실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 분노(화선지 수묵담채, 44x44.5cm, 2003)


문인화는 유구한 역사적 발전 과정을 통해 풍부한 조형적 경험을 축적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는 동양회화의 전통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오늘에 있어 문인화가 처한 상황은 본연의 위상과는 전혀 걸맞지 않는 참담한 지경에 놓여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심지어 오늘의 문인화는 전통미술의 적자로서 응당 지녀야할 최소한의 존중도 받지 못한 채, 오히려 그 존재 가치마저 회의되고 있다 할 것이다. 작업을 업으로 하지 않는 시대, 삶의 쉼터로 생각하고 한바가지 샘물을 들이키는 정도의 청수한 마음의 표현으로 생각하던 시대의 경지를 어떻게 재현하고 계승해 야 하느냐 하는 점은 바로 조문희 화백의 고민 속에 묻어있는 숙제이자 무엇보다 우리미술계에서도 절실하게 요구되는 과제일 것이다. 생동적이며 때로는 분방하게 운필되는 수묵필치와 필의, 자율적 형상과 생명감이 사군자를 비롯한 여러 소재를 문인화의 격조로 그리고 있는 이 시대의 ‘문인화가 갈산(갈미) 조문희 화백’의 미학세계는 삶의 쉼터, 마음의 표현, 여백의 매력을 회화적 조형성으로 호흡하고 있다. 그가 채우는 화폭의 ‘매화’가 추운 겨울엔 죽은 듯 봄이 되면 꽃이 피듯이 그의 삶과 대비되고 있다. 깊어가는 가을에 조문희 화백이 그리는 ‘국화’에서는 그래서 향기가 그렇게 진한가 보다. 사람들의 진한 삶의 향기와 함께.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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