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속의 황신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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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속의 황신혜
  • 윤여문<청운대 교수·칼럼위원>
  • 승인 2016.01.14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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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일종의 섬광같은 것이었다. 군 입대를 기다리는 어느 겨울, 약속시간이 어중간히 남아 무엇을 할까 망설이다가 강남 타워레코드 매장을 둘러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당시, 약속 장소에 일찍 도착해 시간이 어중간하게 남으면 근처 대형 서점이나 레코드 가게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때우는 것이 보통이었다. 나름 관심 있는 책과 음반을 들춰보고 있으면 시간이 어느새 쏜살같이 흘러 되레 약속시간에 늦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날도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정확히 강남 타워레코드 매장의 구석진 'Rock' 섹션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알파벳 순서대로 빼곡히 채워진 수많은 록 앨범 속에 얼굴을 파묻고 새로운 음반을 찾거나 독특한 디자인의 앨범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정신줄을 놓고 좋아하는 록밴드의 앨범을 둘러보고 있는데 문득 알 수 없는 따뜻한 기운이 등 뒤에서 느껴졌다. 마치 누군가 내 뒤에서 매장의 수많은 형광등과 조명을 일시에 매우 밝고 환한 핑크색으로 갈아 끼운 것 같이 은은하면서도 강렬한 느낌이었다. 내가 그 섬광같은 불빛과 알 수 없는 기운에 이끌려 고개를 돌린 순간, 시간은 슬로우 비디오처럼 매우 느리게 흘렀다. 나는 삼류 코믹 드라마에서 나오는 조연처럼 입을 헤벌리고 눈부시게 빛을 발산하는 물체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 섬광이 빛을 서서히 줄여 드디어 원래의 형체를 어렵지 않게 인지할 수 있었을 때, 나는 그가 황신혜였다는 것과 사람의 몸에서도 빛이 발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사실 그날의 황신혜는 그렇게 화려한 자태를 드러내는 의상이나 모습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놀랐던 것은 노란색 타워레코드 쇼핑 바구니를 팔에 끼고 매장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그녀의 일상적인 모습만으로도 저렇게 빛난다면, 드라마에서처럼 전문적으로 치장하고 한껏 멋을 부린 모습은 도대체 얼마나 예쁠 것인가 상상하니 도저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그런 모습을 본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동공이 풀린 채로 털썩 주저앉거나 모래가 돼 산산이 부서질 것이 틀림없을테니 일상복의 그녀 모습을 보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 판이었다. 주위의 시선을 알아채지 못하고 매장을 느릿느릿 걸어 다니는 그녀의 한걸음 한걸음은 패션쇼에서 우아하게 워킹 하는 모델의 그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한동안 짝사랑했던 내 마음 속의 쌍두마차인 탤런트 이미숙과 채시라를 배반하고 불혹을 넘긴 지금까지 오매불망 황신혜만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갖게 됐다.

가끔씩 나는 한 템포 늦은 순발력 때문에 일을 그르치거나 훗날 땅을 치며 크게 후회하는 일들이 제법 있었는데, 타워레코드에서 만난 그녀에게 바보처럼 아무 말도 못하고 혼자 수줍어하다가 지나쳐버린 그 날의 일이 이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제일 아쉽다. 여고생처럼 ‘꺄악, 언니. 너무 반가와요’하며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발을 동동 구르며 호들갑을 떨지는 않더라도, 점잖게 다가가 ‘허허허. 반갑습니다. 악수나 한 번 할 수 있을까요?’라고 묻지 못한 나의 수줍음을 수백 번도 더 질책했다. 만약 그때 내가 어떠한 말이라도 건넸다면 그녀의 커다란 눈을 마주보며 악수를 할 수 있었는데 말이다.

나는 마흔을 넘긴 지금도 여전히 그녀에 대해 불가능하지만 확신에 찬 몇 가지 믿음을 갖고 있다. 예컨대, 황신혜는 청국장, 홍어삼합, 곱창전골처럼 냄새가 고약하거나 보기에 좋지 않은 음식은 절대로 먹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시골 아낙들이 즐겨 입는 몸빼 바지같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라는 확신, 지금까지 방귀는 단 한 번도 뀌지 않았을 것이라는 확신, 심지어 아침에 일어나 양치질을 하지 않아도 입에서는 꾸릿꾸릿한 냄새 대신 프랑스에서 직수입한 고급 향수 냄새가 날 것이라는 확신이 그 대표적인 믿음이다.
또한, 자신의 손길이 닿기만 하면 포도나무에 수박이 주렁주렁 열리게 할 수 있고, 호랑이가 토끼에게 진땀 흘리며 쫓겨 다니게 할 수도 있으며, 햇볕이 작렬하는 사막에서 비를 내리게 할 수도 있고, 그리고 시름시름 앓는 중환자를 벌떡 일으켜 세울 수 있는 능력을 그녀는 분명히 갖고 있음을 나는 지금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수십 년째 마음 속에 담고 있는 황신혜를 꿈에라도 만나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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