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기 660년 8월2일 나당연합군의 전승 축하연이 사비도성(부여)에서 성대하게 거행된다. 무열 왕과 소정 방을 비롯한 개선국의 왕과 장수들이 당상에 둘러앉았고 의자왕과 부여융은 그 아래 무릎을 꿇려 있다.
의자왕은 패배한 나라의 왕으로서 승자들의 술잔에 술을 따르는 치욕을 겪어야 했고 김법민(후일의 문무왕)은 말 위에 올라 앉아 부여 융에게 침까지 뱉는 모욕을 주었다. (이덕일, 김병기. 산성으로 보는 5천년의 한국사)
후일, 복신과 도침들의 백제부흥전쟁마저 허망하게 실패한다. 마침내 한반도에서 자웅을 겨루었던 삼국 중 처음으로 백제는 서기 663년 역사의 장에서 사라진다. ‘전쟁은 끝났으나 즐비하던 가옥은 황폐하고 썩지 않은 시체는 풀 더미와 같았다.’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어떤 이는 인류의 역사는 환호성 속에 건설되었다가 눈물 속에 폐허가 된 기념물의 연속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시인 이달(李達)은 ‘백마강 회고’에서 백제의 흥망을 시사(詩史)로 쓴다.
“백제의 흥망은 세월 벌써 아득해 / 먼 구름 지는 햇볕 속엔 고기잡이와 나무꾼뿐일세 / 산과 강의 그 패기는 모두 스러지고 / 시끌 거리던 관청과 시장은 이미 적막해라 / 궁전에서 임금님이 거나 했을 저녁인데 / 아래 강엔 비바람 속에 조수만 밀려드는데 / 용이 백마를 탐내어 천년 한이 되었건만 / 저 물가의 풀과 꽃들은 아무것도 모르겠지. (허경민, 국역손곡집)
百濟興亡歲月謠 백제흥망세월요 斷雲殘照見漁樵 단운잔조견어초
山河覇氣全消歇 산하패기전소헐 朝市餘聲己寂寥 조시여성기적막
正殿君王驕醉夕 정전군왕교취석 下江風雨滿歸潮 하강풍우만귀조
龍貪白馬千年恨 용탐백마천년한 汀草汀花未解嘲 정초정화미해조
홍성과 공주, 부여는 트라이앵글(triangle)을 이룬다. 그리고 가운데쯤에 청양이 있다. 이달(李達)은 고향 홍주에 잠시 머물다 청양을 거쳐 공주와 부여 땅을 지나며 일곱편의 시를 남긴다. ‘부여를 지나다’의 7, 8구(句)에 ‘성충의 무덤은 어디 있는지 말 세워놓고 나 혼자 흐느끼네’ 백제 사비성의 최후, 악몽의 역사가 재현 될것만 같은 불길함에 더욱 비통한 감회에 젖는다. 시인은 지금 임진왜란의 한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40여 년 전 홀로 배낭을 메고 위의 코스를 따라 향토 역사 스케치 여행을 했다. 그리고 지난해 6월초 공주와 부여를 다시 찾았다. 30도가 넘는 불볕 아래 백강(白江)은 여전히 느리게 흘렀고, 고관사 높은 석벽이 푸른 그늘에 잠겨 있었다.

동양화가, 운사회장
글·그림 / 오천 이 환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