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대를 건너뛴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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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세대를 건너뛴 표현
  • 윤여문 <청운대 교수·칼럼위원>
  • 승인 2016.04.28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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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에 서너 번 아버지를 모시고 경기도 북부에 있는 선산에 다녀온다. 자유로를 타고 파주를 지나 잘 닦여진 몇 개의 국도를 따라가면 한 시간 안팎으로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수십 번 다녀온 길이니 이제는 내비게이션 도움 없이도 어렵지 않게 찾아 갈 수 있다.
아버지는 말을 아끼다 못해 무뚝뚝하다. 요즘처럼 녹음이 푸르른 날에 모처럼 막내아들과 단둘이 나들이 하면서 이런저런 정겨운 대화를 나누면 좋을 텐데, 아버지는 먼저 대화를 이끌지 않으면 도통 말씀이 없다. 운전하는 한 시간 동안 “다음 삼거리에서 좌회전해라”, “돌아가는 길에 점심 먹자” 정도의 말씀만 하니 이따금 아버지와 함께 하는 침묵의 운전이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말씀이 없는 만큼 칭찬에도 인색하다. 지금까지 ‘축하한다’, ‘사랑한다’라는 말을 막내아들인 나조차 들어 본 적이 없으니 형이나 누나들이 이 기분 좋은 말을 들었을 가능성은 더욱 희박하다. 내가 사십 몇 년 동안 살아오면서 아버지에게 들은 최고의 칭찬은 결혼 전 양가 부모님 상견례에서 나를 옆에 두고 처가댁 부모님께 하신 말이었다. 아버지는 굉장히 수줍어하면서, “제 자식이라서 이런 말씀 드리는 것은 아니구요. 제가 봐도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말이라는 것이 참 재미있다. “좋은 아들입니다” 또는 “책임감 있는 남편이 될 겁니다”하면 될 것을 굳이 ‘나쁜 놈은 아닌 것 같다’라는 식으로 에둘러 표현할 일이 뭐가 있느냔 말이다. 무뚝뚝한 성격의 아버지와는 반대로 나는 내 아이들에게 하루에도 수십 번씩 “사랑한다”고 말한다.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서로 눈을 그윽하게 쳐다보지 않아도 습관처럼 “사랑한다”고 표현한다. 밥 먹는 모습을 보다가, 함께 손잡고 걸어 가다가, 거실에서 각자 스마트폰을 하다가도 뜬금없이 “사랑한다”고 말한다. 내 사랑의 표현은 시간과 장소 불문이다. 한번은 자동차 상담을 받을 일이 있었다. 자동차에 대해서 묻는 것은 아내에게 맡기고 나는 딸아이와 깔깔대면서 “사랑해”, “너무 사랑한다구”하며 장난을 쳐 아내가 대리점 직원 앞에서 무안했다고 할 정도다. 가끔 “너무 소중해”, “아빠가 기절할 만큼 사랑해”라는 식으로 표현을 바꾸기도 한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횟수만큼 스킨십도 많이 한다. 손잡고, 팔짱끼고, 안고, 어깨동무하면서 서로의 체온을 느낀다. 키와 몸무게, 신발사이즈가 이미 나를 추월한 여드름투성이 중학생 아들은 사춘기임에도 거리낌 없이 뽀뽀를 해준다. 그것이 어떤 방식이든 사랑의 표현은 아이들에게 온화한 성격과 자존감을 키워준다고 믿는다. 자신이 충분히 사랑받고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아이들은 타인에게 관대하고 자기보다 어려운 이에게 도움 주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아이들에게 하는 표현의 일부는 어쩌면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서 받아보지 못한 친근함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이었다. 주말을 이용해 아버지를 찾아뵈었다. 아내와 나는 설거지와 청소를 했고, 아이들은 할아버지 다리를 주무르며 말동무 해드렸다. 몇 시간이 지나자 아버지는 “피곤할테니 일찍 가서 쉬어라”하신다. 그 말을 듣고 돌아갈 채비를 하는데 딸아이가 천진난만하게 “할아버지, 사랑해요”하며 덥석 껴안는다. 기운이 없는 아버지는 손녀를 안고 소파 뒤로 넘어지면서 크게 소리 내어 웃는다. “아, 예쁘다. 그래, 할아버지도 사랑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충격이었다. 당신 아들에게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말을 손녀에게는 저렇게 쉽게 하다니. 그것도 꼬옥 껴안고 크게 웃으면서. 의외의 모습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손녀에게 했던 아버지의 웃음과 표정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같은 연배의 모든 아버지들이 그러했듯이, 내 아버지도 굴곡의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어냈다. 일제 강점기에서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시절, 바로 눈앞에 서성이는 몇 번의 죽을 고비도 넘겼다. 당신 표현대로 ‘달랑 부랄 두 쪽’ 외에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월남한 이 대가족의 장남이 해야 할 것은 오직 짐승처럼 일하는 것밖에 없었다. 부족한 끼니를 때우면 그 다음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고단한 일상에서 ‘사랑한다’거나 ‘아름답다’는 달달한 표현은 당신에겐 감정적 사치가 아니었을까. 예전에 아버지가 과거를 회상하며 지나치듯 한 말이 생각났다. “나는 너희들이 어떻게 컸는지도 모르고 살았구나.” 그땐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가슴 먹먹하게 느껴지는 말이다.

<이 보도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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