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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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눈빛
  • 정규준 <한국수필문학진흥회이사·주민기자>
  • 승인 2016.05.04 11: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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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역은 황사처럼 소리없이 왔다.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에 생명을 거두는 일을 하게 됨은 무슨 섭리인가. 수 년 전 봄날, 공무원이었던 나는 구제역 발생으로 농가의 소들을 매몰하는 업무를 보게 되었다.
수의사가 축사를 돌며 극약주사를 놓으면 소는 격렬하게 죽어갔다. 소들은 하얀 방제복을 입은 수의사를 보면 죽음을 예감한 듯 이리저리 피하다가 마침내 한줄기 눈물을 주르르 흘리고는 주사를 맞았다. 그리고는 네 다리가 묶여 덤프트럭에 실려와 구덩이에 매몰되었다. 추운 밤을 꼬박 지새고 아침 햇살이 보리밭을 눈부시게 비출 때, 마지막으로 실려온 소들이 트럭에서 쏟아 부어지고 포크레인은 구덩이를 묻으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소 한 마리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때로 주사가 잘못 놓여져 이런 현상이 생긴다고 한다. 소는 구덩이 속에서 고개를 들고 어리둥절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우리를 바라보았다. 실하게 성장하여 새끼도 낳고 큰 구실을 할 놈인데 구제역의 한파를 피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넓고 깊게 파진 구덩이는 간밤에 내린 비로 물이 고여 있었고, 죽은 엄마 소들이 널브러져 있는 가운데, 바둥거리며 꺼내달라고 애원하고 있는 것이었다.
수의사한테 전화하여 처리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바빠서 올 수 없다 한다. 직원들이 탄식하며 자리를 뜬다. 자리에 나만 남는다. 소의 눈은 나의 눈에 고정되어 있다. 무심(無心)은 유심(有心)이라 했던가. 깊이를 알 수 없는 눈  속에는 생멸하는 모든 존재의 고통과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 포크레인이 구덩이를 묻기 시작한다. 소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 점점 조여오는 죽음의 늪 앞에서, 울부짖음도 없이 커다란 눈망울엔 슬픔이 가득한 채 그렇게….
죽어간 소의 눈빛은 오랫동안 나를 괴롭게 하였다. 마치 베일로 가려진 막 뒤에서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심판관 같았다.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간 말 못하는 짐승의 절규와 하소연. 그 절박한 순간에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었던 내 자신의 무력감과, 먹이사슬의 꼭대기에서 만행을 저지르고 있는 인간에 대한 분노와 수치들이 죄의식으로 변하여 가슴을 헤집고 다녔다.
그렇게 괴로워하던 어느날이었던가. 나는 거리의 노숙자에게 적선 한푼 하면서 참회의 심정을 달래고 있었다. 부채살처럼 깔리는 금빛 햇살이 신비로운 기운을 느끼게 하는 저녁이었다. 나는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서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구름이 한순간 꿈틀대며 요동을 치는 듯했다. 잠시후 하늘에는 죽어간 소의 얼굴이 나타났다. 소는 연민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따뜻함으로 변하여 나를 감싸 안기 시작했다. 나는 밀물처럼 다가오는 자비의 물결에 젖으면서 형언할 수 없는 위로와 평안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그 순간 소의 눈빛은 모든 것을 품어주고 용서해주는 신의 눈빛이었다. 모든 생명이 하나로 통한다는 것을 나는 선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몸서리치는 공포도, 죽음으로 향해가던 몸짓도, ‘사랑’이라는 존재를 명징하게 알려주는 사건으로 치환되고 있었다.

<이 보도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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