群雅啄尸穴의 土亭 이지함 先生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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群雅啄尸穴의 土亭 이지함 先生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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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8.07.30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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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사랑방

▲ 내포풍수지리연구회 이상운 회장

(群雅啄尸穴의 土亭 이지함 先生墓)
토정(土亭)이지함선생은1517(중종12)~1578(선조11)조선중기의 학자, 기인(奇人), 토정비결(土亭秘訣)의 저자,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형백(馨伯) 또는 형중(馨仲), 호는 수산(水山) 또는 토정(土亭), 목은 이색(李穡)의 후손으로 현령 치(穉)의 아들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偏母膝下)에서 자랐으며 맏형 지번(之蕃) 밑에서 글을 배우다가 뒤에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 들어가 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받게 되었다. 후일에 그가 수리(數理), 의학(醫學), 복서(卜筮), 천문(天文), 지리(地理), 인사(人事), 음양술서(陰陽術書) 등에 달통하게 된 것도 서경덕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1573년(선조6년) 주민의 추천으로 조정에 천거되어 청하(淸河:지금의 포천)현감이 되었고 재직 중 임진강의 범람을 미리 알아 많은 생명들을 구제한 것은 잘 알려진 일화이다.
이듬해 사직 후 고향에 돌아갔으나 1578년(선조11년) 아산현감으로 다시 등용 되었고 부임한 즉시 걸인청(乞人廳)을 만들어 일정한 정착지가 없는 걸인들을 구제 하였으며 노약자와 기인(飢人)을 구호 하였다. 생애의 대부분을 마포 강변의 흙, 담, 움막집에서 청빈(淸貧)하게 지냈으며 그 때문에 토정(土亭)이라는 호가 붙게 되었다. 선생이 의학과 복서에 밝다는 소문이 점차 퍼지게 되자 그를 찾아오는 사람의 숫자가 많아지고 한해의 신수를 보아달라는 요구가 심하여짐에 따라 토정비결(土亭秘訣)을 지었다고 하며 전국 산천을 두루 다니며 명당(明堂)과 길지(吉地)를 점지 하였다. 후에 학덕이 인정되어 이조 판서에 추증 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 이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20호인 선생의 묘지는 충남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 산27-3번지에 있는데 생전에 선생의 명당을 살펴보는 안목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원래 토정선생께서는 지금 이곳을 자신의 신후지지로 정한 것이 아니고 자신만이 알고 있는 명당 하나를 신후지지로 점찍어 놓고 그것을 주변에 말하지 않으셔서 이곳 선영(先塋)에 모셔지게 되었다 하며 이곳은 특이하게도 선생의 묘지 보다 위쪽에 장자(長子)인 충의위공 산두의 묘가를 있는데 이는 역장이 아니라 돌아가신 순서에 의하여 묘지를 조성 한 것으로 선생께서는 1578년에 운명하시고 아드님께서는 21세의 나이에 1559년에 돌아가셨으므로 아드님이 18년 먼저 돌아가신 것이 된다. 이 형국을 논하면 일설에는 맹호입산형(猛虎入山形) 이라 하나 그렇게 보면은 잘못 본 것이라 생각 들며 이 형국을 필자는 반포(反哺) 하지 않는 다는 군아탁시혈(群雅啄尸穴)로 보는데 오서산에서 내려온 맥이 고정리에 이르는데 먹이를 향하여 여러 마리 갈까마귀가 날아드는데 그 중심에 있는 갈까마귀 한 마리가 서해 바다위에 떠있는 시체를 쪼아 먹는 형국으로 주산(主山)은 까마귀가 엎드린 형국이 되며 안산(案山)은 송도 라 부르는 섬이 되며 이 섬이 바닷물이 들어오면 물위에 떠있는 시체사(屍體砂)에 해당 한다.

혈장은 사상혈 중 유혈(乳穴)로 맺었으며 순전(脣前)에 와서는 까마귀 부리 모양을 하고 있으며 아직도 훼손되지 않고 잘 보존되고 있으며 묘지는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금정(金井)을 놓았고 좌측 동쪽 갑방(甲方)의 물이 우측으로 흘러가나 이곳은 바다로 물이 나가므로 국(局)을 형성 하지 못하여 이법(理法)을 위주로 재혈(裁穴)한 묘지로 보기 어려우며 형기(形氣)위주인 물형(物形)위주로 재혈(裁穴)한 묘지로 보여 지며 이 묘 터를 잡기위하여 토정선생님이 오서산을 여덟 번이나 오르내렸다는 일화가 있으나 지면관계상 줄이고 다음 기회에 자세히 토정선생님의 이야기를 하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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