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교육 공존의 터전, 광천리 신랑1동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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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교육 공존의 터전, 광천리 신랑1동 마을
  • 글=장윤수 기자/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6.11.07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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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일구는 색깔 있는 농촌마을사람들 <34>
농촌마을의 위기 극복한 희망스토리를 만나다-광천읍 광천리 신랑1동마을

소규모 마을임에도 6개 학교 자리 잡은 ‘교육의 터’
학교와 긴밀한 협력하며 화합과 단합 잘 되는 마을
김충한 이장·김용희 할머니 중심 뜻 모아 회관 세워
새로운 사내들 많이 태어난다는 의미로 ‘신랑동’ 돼

▲ 마을 인근 중학생들이 신랑1동 노인회원들을 대상으로 봉사활동을 펼쳤다.

◇6개학교 자리잡은 신랑1동 마을
광천읍 광천리 신랑1동 마을은 13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는 마을이다. 신랑1동 마을은 작은 마을임에도 다수의 학교가 밀집돼 있는 독특한 교육마을로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현재 신랑1동 마을 인근에는 광천초등학교, 광천중학교, 광천제일고등학교, 서해삼육초등학교, 서해삼육중학교, 서해삼육고등학교 등이 자리를 잡고 있다. 과거 광동초등학교 부지에 4개 학교를 통합해 지은 광천초등학교가 지난 1일 이전 개교를 완료했고, 현재 구 광천중과 광천여중을 통합한 광천중학교의 신설공사가 진행 중이다.

학교가 인근에 자리 잡고 있다 보니, 서해삼육중고등학교와 신랑1동 노인회는 업무협약을 맺고 매년 한 두 차례 학교 버스를 빌려 여행을 떠나고 있다. 또한 노인회에서는 학교 환경개선을 위해 운동장 제초작업 등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또한 광천중학교 학생들은 신랑1동에 거주하는 노인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실시하고 있기도 하다. 마을에 학교가 많은 것은 자랑이기도 하지만, 상대적으로 주민들이 터를 잡고 살아갈 공간이 많지 않게 되기도 했다. 이러한 까닭에 일부 주민들은 농업에, 일부 주민들은 상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뚜렷한 농촌마을로서의 특색이나 시내권으로서의 특색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도 신랑1동 마을의 특징이다.
 

▲ 신랑1동 마을회관 전경.

◇마을 주민 단합으로 회관 세워
특히 신랑1동 마을 주민들은 서로간 단합과 화합이 잘 되는 것을 가장 큰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마을의 단합이 잘 되는 대표적 사례로 지난 2012년 신축된 마을회관을 꼽을 수 있다. 당초 신랑1동은 마을회관을 가건물 형태로 가지고 있었을 뿐, 제대로 된 회관이 자리 잡지 못했다. 또한 마을기금조차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아 각종 사업에도 어려움이 따랐다. 현재의 김충한 이장은 임기를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마을 발전을 위해 앞장서기 시작했다. 우선 김 이장은 읍사무소에서 이장에게 지급되는 수당을 5년간 전액 마을 기금으로 내놨다. 이와 함께 마을에 홀로 거주하던 김용희 할머니는 자식이 없이 돌아가시기 전, 집은 교회에 기부하고 남은 재산은 모두 마을 기금으로 기탁해 이를 바탕으로 마을회관 건립이 시작됐다.

회관은 마땅한 부지가 없었으나, 서해삼육중고등학교에서 학교 부지 일부를 무기한으로 빌려줘 해당 부지에 건립을 할 수 있게 됐다. 또한 홍성군의 보조금까지 합해 본격적으로 마을회관을 건립하기 시작했는데, 공사 중간에 마련됐던 돈이 모두 떨어져 난감한 상황이 됐다. 김 이장은 마을 주민들에게 소식지를 돌리며 성심껏 도와달라는 요청을 했는데, 주민들은 각자 형편에 맞게 적게는 몇 천 원부터 많게는 수백만 원까지 기금을 내놔 무려 2000여 만 원이 걷혀 마지막까지 공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 김충한 이장(왼쪽에서 네번째)과 마을 어르신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다.

◇마을지명 변경과 역사
신랑동은 광천리 오거리에서 청양방면 도로변에 위치해 있다. 신랑동 지형이 ‘새나블’이라는 악기 모양을 닮았다고 해 ‘새나블마을’이라 불리던 것이 조선시대부터 ‘새낭굴’이라 불리게 됐다고 한다. 새낭굴이라는 지명은 마을 지형이 새가 날아가는 모양을 닮았다고 해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현재 마을입구 쪽이 새의 머리 형상을 하고 있고, 소암부근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부분이 새의 끝부분 형상으로 날개를 활짝 펴고 있기 때문에 ‘새가 날아가는 동네’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전해진다.

새낭굴로 불리던 마을 지명은 한자지명으로 바뀌게 되며 ‘신랑동’으로 바뀌었는데, 당시 초등학교를 다닌 동네 주민은 교장선생님께서 학생들을 모아 놓고 “우리 마을은 새로운 사내들이 많이 태어나는 마을이기 때문에 새신(新), 사내낭(郞)의 한자를 사용해 신랑동이라고 하게 됐다”는 마을 지명의 이야기를 해줬다고 기억하고 있다. 1960년대까지는 신랑동이 1동과 2동의 구분 없이 하나의 마을을 형성했으나, 1960년대 이후 인구가 증가하면서 2개 동으로 나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신랑1동은 완전한 남향을 하고 있어 예로부터 터가 좋은 곳으로 유명했다.

또한 현재 삼육학교가 자리를 잡고 있는 곳은 예로부터 공동묘지가 자리를 잡고 있을 만큼 명당이었다고 전해진다. 또 어른들이 이 부근을 ‘금전구댕이’라고 불렀는데, 학교 건축을 위해 공사를 진행하던 당시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묘를 부셔 관을 열었더니 물이 전혀 스며들지 않고 샛노란 색을 띤 시신의 뼈가 온전히 남아있는 모습을 보고 그렇게 불러온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 광천리 신랑1동 마을 전경.

◇고분군과 안동김씨 거주지
신랑1동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표고 65m 구릉에서는 석촉과 고분군이 발견됐다. 이곳은 공장 부지와 주택 단지가 들어서 옛 모습을 확인하기 어려울 만큼 지형변경이 이뤄졌다. 그러나 주변 지형은 대부분 표고 60m 내외 낮은 구릉이 남향으로 넓게 펼쳐져 있고, 동쪽으로는 광천천, 서쪽으로는 상지천이 흘러 농경과 수렵 및 어로 생활을 한 청동기 시대 생활환경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일부 주민들에 따르면 이 지역 구릉지대에서 석촉이 출토됐다고 하는데, 구체적 형태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또한 고분군은 능선이 동쪽으로 뻗어 내리다가 남향 사면을 이룬 곳에 위치하는데, 현재는 그 형태를 확인하기 어렵다. 이는 평탄한 대지 조성을 위한 개발 및 광천-청양간 도로 개설, 민가 조성 과정에서 지형훼손이 심하게 일어났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구체적인 고분의 축조시기는 알 수 없으나 결성 등지에서 백제고분이 조사된 예로 백제고분의 존재 가능성도 있을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1960년대 이전까지는 신랑 1동 마을 입구에서부터 마을 뒤편 구릉이 있는 곳까지 전부가 소나무 밭이었다고 전해진다. 구릉 위쪽으로 4개의 집이 있었고 사람이 살았을 뿐 동네는 전부 솔밭으로 사람이 살지 않았다는 것이다. 광복을 맞이한 이후 안동김씨 8가구 정도가 터를 잡기 시작하며 마을이 번성하게 됐다.

당시 광천은 상업도시로 전국에 이름을 날리던 시기였으며, 안동김씨는 은하에서 터를 잡고 살고 있었다. 당시 은하면에는 우익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터를 잡았으나 우익과 좌익간 싸움이 격렬해지면서 은하에 살던 안동김씨들이 광천리까지 쫓겨 나오게 됐다고 한다. 처음 신랑 1동에 초가집으로 터를 잡았으나, 광천리에 장이 서고 있었기 때문에 금세 상업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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