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전도사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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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전도사의 죽음
  • 정규준<한국수필문학진흥회이사·주민기자>
  • 승인 2016.11.07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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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 ‘행복전도사’로 불리던 여류인사가 남편과 함께 목숨을 끊었다. 그녀는 ‘홍반성 루푸스병’이라는 희귀병으로 심한 육체적 고통에 시달렸다 한다. 그녀의 죽음은 세상을 놀라게 했고, 나 또한 엄청난 혼란에 빠졌다.

“웃어라! 웃으면 행복해진다!” 금방이라도 세상을 바꿀 것 같은 그녀의 행복론에 사람들은 마법처럼 빨려 들어갔다. 행복은 멀지 않아 보였고, 그것은 ‘희망’이라는 긍정적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내었다. 그러나 병마로 인한 고통이 덜컥 그녀의 발목을 잡는다. 그녀가 죽음을 선택하기까지 얼마나 고뇌했을지는 불 보듯 뻔하다. 자신에게서 희망을 보았던 사람들에게 길을 잃게 하는 책임을 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최악의 선택을 해야 할 만큼 고통은 치명적이었던 것 같다. “행복해지려 했는데 미안하다…”는 마지막 말은 그녀의 심경을 잘 드러낸다.

육체의 질병으로 인한 고통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지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한다. 십자가를 짊어진 구세주 예수의 고통은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에 잔인할 정도로 잘 표현되어 있다. 하늘의 권능을 지닌 예수조차도 육체의 고통 앞에 힘들어하는 장면들을 아찔하게 그려내고 있다.  예수는 구세주의 권능으로 고통을 무효화시키려는 의도는 보이지 않았다. 몰약까지 거부하며 고통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준 초월자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행복론, 자기 정화를 위한 수행법들, 그리고 종교 등 정신적·영적 활동들이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고, 진리를 알기 위한 방편으로 쓰여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본질을 오도한다면, 이는 달이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는 것처럼 심히 경계해야 할 일이다. 들불처럼 번지기 시작한 행복론, 유명세를 타고 사회적 책임자의 위치에 올라선 돌이킬 수 없는 행보,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채찍질과, 대중 앞에서 웃어야만 했던 엄청난 에너지의 소진, 그리고 자신만이 느꼈을 행복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순간들의 그 고독감….

선각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영적 단계는 갓난아기 수준이라고 한다. 그래서 영혼의 DNA에는 고통이 삶의 프로그램 중의 하나로 설계되어 있어, 생의 어느 지점을 방문해 성장통으로 우리를 성장시킨다는 것이다. 인생 중에 찾아온 시련은 잠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고, 가치관을 재정립하는 앎의 시간이 되는 것이다.

결국 행복전도사는 남편과의 동반 자살이라는 가장 초라한 모습으로, 자신을 부인하고 행복론을 무효화시켰다. 거침없던 행복론과 그것을 부인하는 죽음을 통해, 어쩌면 그녀는 빛과 어둠, 선과 악, 행복과 불행의 개념들을 재고해보라고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답은 다시 우리 자신에게 맡겨졌다.

그녀가 세상의 짐을 내려놓고 영혼이 되어 말하는 듯하다. “꿈을 꾸었어요.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요. 우리는 행복에 대해 이야기 했답니다. 모두들 기뻐했어요. 그러나 난 곧 떠나야 했지요. 내가 여행 중이라는 걸 잊었었거든요. 그들도 기억해 낼 거예요. 그곳이 영원한 지복의 땅이 아니라는 것을…”

<이 보도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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