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냉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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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냉이 이야기
  • 유선자 <수필가>
  • 승인 2018.01.18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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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끝과 봄의 시작점에서 냉이를 삶는다. 겨울 보약이라고 말할 만큼 구수한 냉이 된장국. 오랫동안 항아리 안에서 곰삭힌 된장과 잘 어울린다. 특별하게 계절 음식을 찾는 편은 아니나 냉이의 향을 좋아하다 보니 으레 냉이가 나오는 철이 되면 생각을 한다. 된장국 끓일 때, 태양초 고춧가루 반 숟가락 섞어 매운맛 성성하게 내면 어렴풋한 초기 감기쯤이야 물러가리라 싶다. 

몸 안에서는 봄이 솟아오르는 포만감도 일어나니 얼마나 행복한지 냄새만 맡아도 기분이 좋다. 무엇보다 동토에서 자란 냉이 뿌리를 보면 추위를 이겨낸 따스한 열정을 지니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희열이 생긴다.
봄이 오면 바람 일 듯이 내게도 놓쳐 버린 것에 대한 아쉬운 일렁임이 있다. 살면서 모녀지간에 소담한 크기의 추억을 많이 만들지 못했다는 생각이다.

이 세상에 엄마와 딸처럼 가까운 관계가 있을까. 천륜으로 맺어진 ‘모녀’라는 단어가 얼마나 아름다운 말이었는지 나이 들어갈수록 새삼스럽다.
특히 성장하고 나서 엄마와 함께한 시간이 많지 못한 것에 대하여 그리움이라는 대명사로 말하기조차 죄송하다. 봄이 오면 엄마는 냉이를 ‘나싱개(냉이를 의미하는 충청도 사투리)’라고 말했다. “나싱개 캐서 된장국 끓여 먹자.” 어디에서라도 듣고 싶은 그 목소리가 문득문득 생각난다.

지난겨울 친정집에 갔을 때 아버지는 “우리 막내딸, 냉이 된장국 좋아하지?” 대답하기도 전 텃밭으로 나가셨다. 언제부터인지 딸이 내려가면 아버지는 엄마 대신 바지런히 움직이셨다. 하얀 냉이 뿌리를 보여주면서 “겨울 냉이는 뿌리가 튼실하기도 하고 맛도 아주 좋다”면서 환하게 웃으셨다.
올라가면 삶아 데친 후 냉잇국 끓여 남편하고 먹어봐. 엄마가 말했듯이 어느새 그대로 하고 계셨다. 부모의 사랑이란 무엇일까. 인내만으로는 결코 말할 수 없는 포근함. 사랑 그 이상으로 관조(觀照)할 수밖에 없는 희생이 아닐까 싶다.    

산야에 분포돼 있는 냉이 종류를 찾아보니 처음 보는 이름도 많다. 구슬갓냉이, 개갓냉이, 나도냉이, 논냉이, 다닥냉이, 두메냉이, 말냉이, 미나리냉이, 속속이풀, 싸리냉이, 양구슬냉이, 좀아마냉이, 좁쌀냉이, 큰황새냉이, 통영미나리냉이 등 다양하다. 살다 보면 함경북도 백두산 꼭대기에 난다는 두메냉이를 볼 날이 있을지 꿈도 꾸어볼 일이다.
무한한 대자연 속에서 모든 만물이 평등한 존재일진대 자연에서 얻는 행복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으리 냉이로 인한 행복감을 해마다 느낄 수 있음에 마음이 행복하다.  

오늘은 냉이 뿌리의 잔털 가지에 묻은 시간을 본다. 씨 뿌려 준 적 없어도 저 홀로 자란 청고(淸孤)의 냉이. 욕심 없이 살면서도 발생되는 고뇌 앞에서 돌아서고 싶을 때, ‘당신께 나의 모든 것을 바친다는’ 냉이꽃의 꽃말처럼 자신의 신념을 향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무엇이든 안 될까.
누군가의 손길에 의해 캐어진 냉이지만 마음이 심란한 날에는 초고추장에 고소한 참기름 넣어 무친 냉이 나물을 먹어 볼 일이다. 북풍이 부는 날에도 봄빛 그리며 불렀을 연가를 들어볼 일이다. 하늘을 향해 다소곳한 자태로 태어난 곳에서 머무르며 내 부모님의 삶과도 닮았던 뿌리가 고운 냉이. 해빙의 땅에서 살아 희망을 주는 냉이 무침을 먹으면서 추운 겨울을 녹여볼 일이다. 

냉이가 되어 동토에 주저앉아 창공을 본다. 얼마나 따뜻한 곳에서 엄살을 부렸는지 뿌리에 묻은 시간을 볼수록 겨울을 힘차게 뚫고 나온 겨울 냉이의 열정을 만난다. 가슴에 꽃대 하나 올리느라 동토를 견뎌낸 수행자의 냉이 꽃도 벌써 기다려진다.


유선자 수필가는…
충남 홍성 출생, 아주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 2001년 한국예총 ‘예술세계’ 수필 등단, 문학의집·서울회원·수원문인협회 회원, 한국예총 예술시대작가회 제30대 회장 역임, 수필집 ‘풀꽃에 머무는 바람의 노래’, 현) 문화예술기관에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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